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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회색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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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브란절리나'로 불리는 영화배우 앤절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커플. 금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 커플이다. 이들은 라이프 스타일, 가족관계, 스타의 사회 참여, 부의 재환원 등에서 연일 새로운 전범들을 제시하고 있다.

알려진 대로 이들은 '결혼은 노, 동거는 예스'를 택했다. 해외 입양으로 혈연과 결혼제도를 넘어선 다국적.다인종 대가족을 꾸렸다. 일찍이 난민구호운동에 뛰어든 졸리는 수입 가운데 3분의 1을 인도주의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졸리를 좇아 '꽃미남' 피트도 사회파로 변신했다. 최근 그는 400만 달러를 아프리카 자선단체에 기부해 뉴스위크가 뽑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15인'에 올랐다.

이 돈은 지난 4월 태어난 딸 샤일로 누벨 졸리 피트의 사진을 미디어에 처음 공개해 얻은 수익이다. 사진 공개 후 샤일로 누벨의 회색 셔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38달러짜리 이 회색 면셔츠는 미국 매장마다 동이 나 품귀현상을 빚었다.

육아잡지 '페어런팅'의 재닛 챈 편집장은 "갓난아기에게 분홍이나 파랑 같은 성별 구분 없는 중성적인 회색 셔츠를 입힌 것은 참으로 브란절리나다운 일"이라고 평했다. 순백색이 아닌 것도 절묘했다. 말하자면 회색 셔츠는 성적 고정관념과 '순결한 아기'의 전형성을 깬 의외의 연출이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면 졸리를 제외한 피트,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딸 자하라까지 모두 회색을 입었다. 꾸며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느낌의 밝은 회색이다. 가족사진 속 이들의 사랑스러운 회색은 일체의 통념과 경계, 기성 권위를 가로지르며 무화시키는 '브란절리나 패밀리'의 문화적 파격 혹은 쿨(cool)함의 상징으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회색은 죄와 부정의 색이었다. 정체불명.비인간성.우울, 혹은 세속과의 단절 등을 뜻했다. 특히 선명한 이념대립의 시대 회색의 운명은 가혹했다. '회색분자'는 지식인에게 가장 부끄러운 낙인이었다.

그러나 이념과 도덕률, 성(性)정치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분법적 대립과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 회색의 의미는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편도 저편도 아닌' 혹은 '이 말도 저 말도 옳은' 회색분자들의 회색지대야말로 비겁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타협과 절충의 중간지대가 아닌가 말이다.

회색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증오하는 순혈주의, 극단적 근본주의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