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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홀어미가 버린 자식도 잘 살 수 있다, 어떻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33)

잔인한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챙기느라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뉴스1]

잔인한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챙기느라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뉴스1]

매혹적인 라일락, 등나무 꽃향기와 함께 어김없이 5월은 돌아왔다. 4월보다 더 잔인할지 모를 5월이다. 어린이날을 치르느라, 어버이날을 챙기느라,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부모와 자식 챙기기도 바쁜데 배우자의 부모와 형제자매의 자식들까지 포함하면 가정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전 같으면 스승의 날까지 한몫했을 텐데 부정청탁방지법이 생기면서 그나마 그쪽 부담은 줄어 다행이다.

그러나 이 투정 속에서도 막상 챙겨야 할 부모나 자식조차 없는 사람은 또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날일수록 막강한 힘을 드러내는 ‘4인 정상가족’의 신화는 그 범주 안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날카로운 화살을 날린다.

인간의 심리나 정신을 다루는 분야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구도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라고 여긴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부재하거나 힘이 약해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부성 혹은 모성의 결핍으로 인해 인간의 정상적인 발달에 불균형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파악한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이처럼 ‘정상적인’ 가족 형태의 붕괴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 옛이야기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루는 자료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분명 가족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럼 우리 이야기들은 부모의 결핍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 소개하는 이야기는 홍도십경(紅島十景) 중 제6경 ‘슬픈여’에 관련된 전설이다.

바다에 빠져 죽은 부모 부르다 바위 된 ‘슬픈여’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슬픈여 바위. 일곱 남매가 부모를 부르며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차례로 굳어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사진 국립공원공단]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슬픈여 바위. 일곱 남매가 부모를 부르며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차례로 굳어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사진 국립공원공단]

아주 옛날 마음씨 고운 부부가 일곱 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명절을 맞아 제물과 아이들의 새 옷을 사기 위해 뭍으로 나갔다. 일곱 남매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부모가 탄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심한 돌풍이 일어 큰 파도가 배를 덮치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일곱 남매는 부모를 부르면서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차례로 굳어 바위로 변했다. 그 바위가 슬픈여 또는 일곱 남매 바위라 불린다.

이 서사는 부모가 이 세상에 없다면 더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일곱 남매의 좌절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 부모가 있다는 것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매우 살벌한 서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홀어미가 아들 형제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아이들 글공부를 가르치려고 독선생을 들여앉혔다가 욕정을 품게 되었다. 선생도 자꾸 들이대는 홀어미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받아주고 있었는데 홀어미는 어느 날 선생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아들 둘을 죽여 버리고 둘이서 어디 멀리 도망가서 살자는 것이었다.

독선생이 괴로워하는 사이 홀어미는 사냥꾼에게 돈을 많이 주고 청부살인을 모의한 후 아이들에게는 산에 가서 진달래를 따 먹으며 놀다 오라고 내보냈다. 사냥꾼은 적당한 곳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려고 했지만 도저히 아이들에게 총구를 맞출 수가 없어 헛방만 날리고 말았다.

사실 큰아들은 엄마가 하는 말을 엿듣고 상황을 대강 알고 있었기에 사냥꾼 앞에 나서며 자기를 그냥 쏘라고 했다. 사냥꾼은 뒷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도망가라고 하며 아이들을 보내주었다. 형제는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면서 15년 후에 아버지 묘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부지런하고 똘똘했던 형은 서울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가게 되어 형편이 풀렸지만, 동생은 그저 얻어먹으면서 고생고생했다. 그러다 형과 약속했던 재회의 날에 제사상을 차릴 것만 겨우 장만해 아버지 묘 앞에 가 형을 기다리다가 추위에 쓰러졌다. 형은 약속 날짜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날 밤늦게야 부랴부랴 아버지 묘에 가 쓰러져 있던 동생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얼어 죽어 가던 동생은 몸이 녹자 살아났고 형은 동생을 좋은 데로 장가보내고 함께 잘 살았다.

엄마에게 버림을 받은 아들 형제는 안 겪어도 좋았을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잘 견뎌내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됐다. 딸이라고 자식을 내버렸던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 대왕이나 부모덕이 아닌 자기 복에 산다고 대답하는 셋째딸을 내쫓았던 부자 아버지도 모두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다.

바리공주. 딸이라고 자식을 내버렸던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 대왕이나 부모덕이 아닌 자기 복에 산다고 대답하는 셋째딸을 내쫓았던 부자 아버지도 모두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다. [중앙포토]

바리공주. 딸이라고 자식을 내버렸던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 대왕이나 부모덕이 아닌 자기 복에 산다고 대답하는 셋째딸을 내쫓았던 부자 아버지도 모두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다. [중앙포토]

그런데 우리 옛이야기에서는 부모 없으면 못 산다고 따라 죽는 자식보다는, 자식을 내쫓거나 심지어 죽이려는 부모가 있어도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많다.

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한쪽이 부재하다고 해서 부성이나 모성, 혹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결핍돼 문제가 생겼다고 하기는 어려운 서사가 있다. 부모 없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부모상을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있다. 없으면 만들기라도 한다는 태도와 다른 방식의 의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부모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 인생들

부모의 영향력에 휘둘리기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상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라야 한 인간으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가족만이 살아갈 힘이고 가족만이 안전한 은신처라는 생각이 사실은 정말 의존적이고 완고한 사유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방질에 미친 어머니를 두었던 가엾은 형제처럼 부모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모를 뒀다면 가족 밖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통해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가족 범주 안에 묶어 놓고 관망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어려움을 사회 공동체가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더욱 요구되는 일이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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