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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꽃 핀 큰어머니 팔순 모임, 나의 미래도 이렇기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13)

“부모님들이 모두 건강하셔서 이렇게 다 같이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십여 년 만에 만난 사촌 동생이 식사 중 내내 하던 말이다. 80대 안팎의 어르신들이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지난 토요일 오후 아버지 형제 네분과 큰어머니들, 그분들의 아이들(사촌)과 그들의 아이들(조카)이 한자리에 모였다. 호주에 거주하시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사촌 동생 가족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큰아버지는 생존해 계시는 아버지 형제 중 가장 윗 형님으로 올해로 86세가 되셨다. 40대 초에 호주로 이민을 하셨으니 40여 년을 해외에서 보내고 계신 셈이다. 호주 큰아버지, 오래전부터 가족들은 큰아버지를 그렇게 불러왔다. 이번 한국 행은 80세가 되신 큰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네 형제 내외 분이 한자리에 모이셨다. [사진 김현주]

아버지의 네 형제 내외 분이 한자리에 모이셨다. [사진 김현주]

네 형제 중 막내인 나의 아버지(78세)와 호주 큰아버지 사이에는 두 분의 큰아버지가 계신다. 살고 계시는 지역을 앞에 붙여 안양 큰아버지(80세), 삼성동 큰아버지(79세)라고 부르며 자랐다. 호주의 가족들이 한국에 도착한 후 아버지 형제분들은 한 차례 만나셨지만 사촌들과 조카들까지 한꺼번에 보지는 못했던 터라 다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형이 한국에 와 계시는 동안이라도 형제분들이 자주 만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호주 큰집과는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다. 대학 시절 어학연수로 6개월간 시드니에서 지낸 적이 있다. 큰아버지가 그곳에 계셨기에 불안감 없이 떠날 수 있었다. 호주에 왔으면 당연히 본인 집에 머물 것이라는 큰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도착하자마자 홈스테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후에는 시드니 대학생이 모여 사는 셰어하우스에 입주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고대했던 외국 생활이니 가족과 함께 지내기보다는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큰아버지는 그런 나의 결정을 지지해주셨다.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호주에 머무는 동안 늘 별일은 없는지 챙기셨고 주말이면 집에 불러 바비큐를 구워 주시고 반찬들을 들려 보냈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며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흥겹게 어울려 지낸 그때,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던 그때는 지금 떠올려봐도 내 인생의 ‘화양연화’다. 그 시기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해 주신 큰 집 가족들이기에 나에게는 조금 더 애틋할 수밖에 없다.

“아빠, 엄마 연세 때문에 다시 한국에 나오시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부모님이 어느새 나이가 팔순이 넘으셨으니. 하긴 우리도 이 나이가 되었으니 말 다했죠.” 사촌 동생이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시드니에 있었을 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다. ‘부모님이 거쳐 가신 나이를 뒤쫓아 살아가고 있구나’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스무 살의 내가 의지하고 기대하고 어려워했던 분들의 나이가 지금의 나와 남편의 나이였다니, 새삼스레 내 나이의 무게가 느껴졌다.

호주 큰집과는 연이 깊다. 호주 유학 시절, 큰아버지 내외께서는 주말이면 불러서 고기를 구워 주시고, 반찬을 내어 들려 보내곤 하셨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사진 pixabay]

호주 큰집과는 연이 깊다. 호주 유학 시절, 큰아버지 내외께서는 주말이면 불러서 고기를 구워 주시고, 반찬을 내어 들려 보내곤 하셨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사진 pixabay]

연재 첫 회에 소개했던 중년여성을 위한 뉴스 콘텐트 프로젝트 ‘인생 2막, 여자 나이 50’을 진행할 때 취재한 내용이 떠올랐다. 중년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부모님의 노환이라는 인터뷰이다. 은퇴할 나이인 중년이 되었지만, 취업과 결혼, 자립이 늦어지는 아이들과 건강 상태가 나빠지는 부모님 사이에서 정서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였다(아래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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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의 이중고 아래서 본인의 노후는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중년의 삶! 내 앞에 앉아 있는 저분들은 어떻게 그 시기를 거치셨는지 부모님의 지난 시간을 자식의 입장에서 떠올려봤다.

형제분들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어디를 갔었죠? 다 같이 모였었잖아요.” “아, 그 아이가 몇째였더라. 누가 먼저 태어난 거지?” “더 늦기 전에 호주에 한번 놀러 와. 공기 좋은 데서 좀 쉬어가면 좋잖아.” 함께 기억을 더듬고 감탄하며 회상하는 자리! 점심을 마친 나와 사촌들은 이후 스케줄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좀 걸으실 수 있으실까? 집으로 가서 차를 마실까? 날씨가 나쁘지 않으니 공원 쪽이 어떨까?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호주 큰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그냥 너희는 너희 일 보러 가. 우리는 어디 가서 커피 한잔하고, 이야기 좀 더 하다가 알아서 움직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식당을 나서는 여덟 분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가벼워 보였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챙기시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30년 후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오랜만에 다시 펴본 책.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사진 김현주]

오랜만에 다시 펴본 책.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사진 김현주]

『사는 게 뭐라고』(마음산책)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있다.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 사노 요코는 60대에 유방암에 걸린 후 72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시즈코 씨』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등 왕성하게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사는 게 뭐라고』에서 작가는 냉소적이지만 유머러스한 톤으로 노년의 일상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전달한다.

"인생은 번거롭지만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 역시 젊은 시절, 마음만은 화사했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순이 넘었다. 화사한 생명 같은 건 완전히 잊었다. 이 나이가 되니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아아 당신도 잘살아냈구나. 이 체온으로, 이 뼈로, 이 피부로. 사람은 사랑스럽고 그리운 존재구나."

그녀가 적어낸 깨알 같은 속마음을 통해 나의 노년 생활을 조금 더 그려볼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그 책을 찾아 뒤적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딸, 오늘 수고 많았어. 우리 이제 집에 들어왔어. 차 마시고,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머무시는 호텔에 가서 이야기 더 하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다니까. 정말 오랜만에 실컷 이야기 많이 했다”

한 톤이 올라간 엄마의 목소리만으로도 오후 내내 여덟 분이 어떤 시간을 보내셨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네, 다들 너무 좋아 보이셨어요. 감사할 뿐이에요. 조만간 호주에 한번 가요, 엄마. 내 나이 때 엄마가 딸을 위해 만들어주셨던 최고의 시간, 이제 제가 만들어 드려야죠.’ 전화를 끊으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김현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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