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재판서 공개된 외교기밀…“한국 협상전략 다 노출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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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한·일 간의 외교가 전례 없이 심각한 상황이고, 일본 정부도 (이번 재판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윤병세 “이번 재판 일본도 주시” #외교가, 한·일 관계 악영향 걱정 #“정권 바뀔 때마다 기밀 공개되면 #어느 나라가 민감한 정보 주겠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 증인으로 출석한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14일 윤종섭 재판장에게 비공개 재판을 요청했다. 한·일 간의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문제가 다뤄지는 점, 이에 대한 외교 기밀이 공개되고 자신의 답변 과정에서 강제징용에 대한 정부의 내부 대책이 드러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윤 전 장관은 “성실하게 답변하겠다, 증인 신문만 비공개로 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공개재판을 주장하는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이날 재판에선 2급 비밀을 포함해 외교부의 강제징용 관련 기밀문서들이 공개됐다. 외교 기밀은 현행법상 30년이 지나야 공개할 수 있다. 문건의 대부분은 5~6년 전 작성된 기밀이었다.

검찰이 공개한 문건 중에는 박근혜 정부 외교부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연기의 필요성을 밝힌 ‘재판거래 의혹’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 등에 제소할 경우 한국 외교부가 부정적 결과를 예상했다는 사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검찰과 법원이 정부의 외교 전략을 일본에 알려주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은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다. 법원조직법상 비공개 재판은 국가의 안전보장, 안녕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법원이 강제징용 관련 기밀에 대한 안전보장의 우려를 엄격히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다른 나라와 협상한 내용이 아닌 우리 내부의 논의 과정이 담긴 문건”이라며 “윤 장관의 주장처럼 외교 기밀의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교가에선 이런 검찰과 법원의 주장에 대해 “적폐청산 이외의 다른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 단견”이라고 반발한다. 대미 협상을 담당했던 전직 외교관은 “국내 내부 논의도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위한 과정”이라며 “외부 협상과 내부 논의를 따로 분리해 비밀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 알려지면 대외 협상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다른 외교관도 “지금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난 정부의 외교 기밀이 공개된다면 어떤 나라도 우리에게 민감한 정보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법원과 검찰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을 공개하는 것이 여론을 의식하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법원은 ‘제 식구 감싸기’를 한다는 비판이 우려되고, 검찰은 재판거래 의혹이 언론에 보도될수록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증인신문을 마친 윤 전 장관은 기밀 공개에 대한 우려에 “법원 밖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아직 윤 전 장관 등 증인으로 출석한 전직 고위 외교관들에 대한 불기소 처분을 내리지 않았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들의 증언과 태도에 따라 검찰은 언제든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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