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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아프리카 친구가 준 약가방, 100억 마약 숨어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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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울중앙지검에서 지난 2017년 적발한 필로폰 이미지. [중앙포토]

서울중앙지검에서 지난 2017년 적발한 필로폰 이미지. [중앙포토]

필리핀에서 무역 사업을 하는 60대 이모씨는 지난해 가나 출신의 사업 파트너 ‘톰’을 만났다. 이씨는 활달하고 언변이 좋은 톰과 가정사나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 어느 날 이씨가 일본에 갈 일이 있다고 하자 톰은 “마침 잘됐다. 일본 공항에 마중 나올 지인이 있는데 가방 하나만 전달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일본에 가방 전달” 부탁받은 60대 #공항서 필로폰 2kg 적발돼 체포 #3~4월 운반책으로 걸린 건수 5건 #“친분 있어도 짐 절대 맡아선 안돼”

톰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이씨는 지난달 일본에 입국했지만 공항 관계자들이 그를 막아섰다. 일본 세관이 이씨의 가방에 숨겨진 필로폰 2㎏을 찾아낸 것이다. 이씨는 "지인인 톰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유치장에 수감됐고, 일본 사법당국의 형사처벌을 피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가나, 나이지리아, 시에라리온 등 서아프리카 마약 범죄조직이 한국인들을 속여 마약 운반책으로 이용하는 일이 늘고 있다. 국가정보원 국제범죄정보센터에 따르면 한국인이 마약 운반책으로 해외에서 검거된 횟수는 지난 두달(3~4월) 동안에만 5건에 이른다. 국정원 관계자는 “최근 아프리카 조직에 속아 마약 밀수범 처지가 된 한국인들이 급증해 마약 조직원들과 범죄 활동 내역 등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아프리카 지역은 마약으로 악명이 높다. 마약을 유통할 뿐만 아니라 코카인, 헤로인, 필로폰 등을 자국에서 대량으로 생산한다. 이들이 생산한 마약은 주로 미국, 남미, 유럽 등에 유통됐지만 최근에는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까지 밀수되고 있다. 국제 수사기관에서는 이같은 마약 판매 수익이 내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군벌이나 범죄 조직의 자금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아프리카 내전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아프리카 내전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일본서 마약값 10배 뛴다” 한국인 밀수책 이용

한국인들이 아프리카 마약조직의 타깃이 된 것은 한국이 국제적으로 마약청정국으로 인식돼 한국 국적의 사람들이 큰 의심을 받지 않고 밀수를 할 수 있어서다. 최근 남미, 대만 등 마약조직에서 한국을 중간 경유지로 삼아 대량의 마약을 일본ㆍ중국 등에 유통해 논란이 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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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순히 국가를 경유지로 삼는 차원을 넘어 한국인들이 직접 마약을 운반토록 하는 것이다. 수사 당국은 과거에는 아프리카인 조직원들이 직접 몸에 마약을 숨기고 밀수에 나서기도 했지만 마약으로 몸살을 앓는 해외국가들이 검색을 강화하자 차선책으로 한국인들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마약은 일본, 싱가포르 등에 넘어가기만 하면 가격이 10배가량 뛰기 때문에 범죄 조직들이 유통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한다. 국정원 관계자는 ”일본이나 싱가포르 같은 국가들은 마약의 유통이나 투약을 강력하게 규제하는데, 이로 인해 마약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오히려 가격이 급등했다”며 “결국 이들 국가에 마약을 유통하는데 한국인 만한 타깃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약 밀수범으로 전락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의 평범한 일반인이다. 친근하게 접근해 신뢰를 쌓은 뒤 "급한 물건을 전달해달라"는 마약조직원들과 브로커들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해 화를 입었다. 지난 3월 라오스에서 아프리카계 흑인을 만난 70대 남성 최모씨는 “일본에 갈 때 서류 가방을 친구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줬다가 일본 공항에서 필로폰 은닉혐의로 체포됐다.

아프리카 지원사업 하려다 아내와 체포되기도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마약조직들은 아프리카 봉사활동이나 지원사업에 뜻이 있는 한국인을 표적으로 삼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접근해 작업에 나서기도 한다.

아프리카 지원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60대 김모씨는 SNS에서 가나 출신의 ‘크리스’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크리스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특성이나 자세한 지원 방식까지 설명해주며 김씨의 환심을 샀다. 몇달 뒤 크리스는 김씨를 남아공으로 초대했고, 김씨는 아내와 함께 남아공으로 가 크리스를 만났다.

크리스는 이곳에서 “아픈 친구를 위한 의약품 가방을 일본에 건네주면 지원사업을 도와주고 대가도 지급하겠다”며 약품 가방을 건넸다. 가방을 열어보니 실제로 의약품들이 있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뒤 일본공항에 도착한 김씨는 아내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크리스가 건넨 가방에는 이중 칸막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 시가 100억원 상당의 필로폰 3㎏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피해사례가 잇따르자 정부 기관에서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여름철 여행 성수기가 다가오면서 피해사례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여행업체 등과 협력해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주요 수법과 피해 사례를 공유하고 안내문을 배포한다는 계획이다. 또 해외 정보기관들과 공조해 서아프리카 마약조직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선 상태다.

국정원 국제범죄정보센터 관계자는 “아무리 친분이 있는 외국인이어도 가방 등을 해외로 전달해달라거나 공항에서 물건을 맡아달라는 등의 부탁을 하면 거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마약 운반은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중범죄로 취급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제안을 받는 즉시 국정원 111 콜센터에 신고를 하면 수사기관과 협조해 검거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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