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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도 부양 굴레…주름진 어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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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시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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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모(65)씨는 중소 제조업체에서 정년퇴직한 뒤에도 계속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예전과 비교하면 돈벌이는 시원찮지만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박씨는 “결혼한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력이 닿는 데까지 일하고 싶다”며 “애들이 고마워하는지, 그래도 어버이날은 제대로 챙긴다”고 말했다.

은퇴 73세, 가장 오래 일하고 #빈곤율 46%, 가장 가난하고 #자살 3.2배, 마음도 많이 아파

한국의 ‘시니어’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늦은 나이에 은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OECD가 최근 펴낸 ‘한눈에 보는 사회 2019’(Society at a Glance 2019)에 따르면 한국인이 노동시장에서 떠나는 ‘유효 노동 시장 은퇴연령’은 2017년 기준으로 남성이 72.9세, 여성이 73.1세로 36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OECD 평균(각각 65.3세·63.6세)과의 격차도 상당하다.

이에 따라 일을 그만두고 남은 수명을 뜻하는 ‘은퇴 후 기대수명’은 남성이 12.4년, 여성이 15.5년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짧았다. 한국인의 예상 수명은 남성은 85.2세, 여성은 88.6세로 OECD에서도 손꼽히는 장수(長壽) 나라다. 그런데도 ‘은퇴 후 기대수명’이 짧다는 것은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 은퇴 시기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늦기 때문이다.

가족부양·자녀교육 힘 쏟다 노후 방치

이는 나이가 들어서까지 생계를 유지하거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시니어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는 시니어들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OECD가 이 보고서를 처음 낸 2001년 판에서도 한국 남녀의 은퇴 후 기대 수명은 11~15년으로 지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요컨대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니어들의 평균 수명은 늘었지만 이를 일하는 데 쏟아 부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시니어들에게 남은 것은 팍팍한 살림이다. 중위 소득의 50% 이하에 속하는 인구를 전체 인구로 나눈 값인 ‘상대적 빈곤율’은 한국이 2016년 기준 15.9%로 OECD 평균(12.3%)보다 3.6%포인트 높다. 그러나 65세 이상의 빈곤율은 45.7%로 36개국 가운데 압도적 1위다. 어림잡아 노인 2명 중 1명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얘기다. OECD 평균(13.5%)은 물론 2위인 에스토니아(35.7%)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시니어 상당수가 자녀 교육과 가족 부양에 힘을 쏟다 보니 제대로 돈을 모으지 못했고, 퇴직 후 일자리도 대부분 단순노무직·일용직 등으로 질이 낮아 노후 소득을 마련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시니어들은 6·25전쟁, 보릿고개 시절을 거치면서 한국의 1960~80년대 고도성장기를 이끈 주역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하며 국방·납세의 의무를 다했다.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 젊음을 바쳤고, 중년이 돼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를 교육시켰다.

OECD 주요국 노년층의 상대적 빈곤율

OECD 주요국 노년층의 상대적 빈곤율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경제·사회 분위기 속에 그들은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과거 그들에게 ‘의무’였던 효(孝)와 부모 봉양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선택’이 됐다. 시니어들은 정작 자신의 노후에는 신경 쓰지 못해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정부가 노인 빈곤 해결을 위해 기초연금을 인상하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해 의료 혜택도 늘렸지만 한계가 있다.

노인 혐오 트렌드 생겨 소외감 커져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는 고령층을 보호할 마땅한 사회안전망이 확충되지 못하다 보니 이들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며 “베이비붐 세대의 인구 증가와 급속한 고령화를 고려할 때 88년부터 시작한 국민연금 제도는 상당히 늦은 감이 있다”고 짚었다.

여기에 사회적으로 경로(敬老)라는 말은 희미해지고, 그 빈자리에 조롱과 멸시·혐오 표현들이 스며들며 혐로(嫌老·노인 혐오)라는 트렌드까지 생겼다.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이 10만 명당 54.8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한 배경에는 이런 경제·사회 분위기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의 노인자살률은 OECD 평균의 3.2배, 미국의 3.5배, 일본의 2.3배다. 심리적 고통도 커지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 5년(2013~2017년)간 조울증 환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4.9%지만 70대 이상 환자의 증가율은 12.2%로 가장 높았다. 20대(8.3%)에 이어 60대도 7.2%로 나타나 증가세가 뚜렷했다.

정부, 미래 세대 부담에 연금 못 늘려

급격한 저출산·고령화 추세로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질 전망이다. 하지만 과거처럼 시니어를 부양하고 공경하기에는 경제적·시간상으로 벅찬 젊은 세대의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젠 개인이나 가정에만 이런 문제의 책임을 지워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김낙년 교수는 “노령연금 등을 확충하는 방안이 있지만 미래 세대를 위한 국민연금 재정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현재로선 건강한 시니어들이 좀 더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한눈에 보는 사회 2019’(Society at a Glance 2019)

OECD가 나라별로 주요 경제·사회 지표를 모아 2~3년마다 한 번씩 발간하는 보고서다. 36개 회원국과 중국·러시아 등 주요 협력국의 사회상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할 수 있어 각국 정부·연구기관·언론들은 이 보고서에 담긴 지표를 자주 활용한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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