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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붙은 미 낙태논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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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낙태는 살인행위다』『낙태는 이혼처럼 선택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 지난 16년간 미국사회를 첨예하게 갈라놓은 낙태논쟁은 지난 3일 미연방대법원이 격론 끝에 주 정부에 임신부의 낙태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낙태 옹호론자의 패배로 일단락 됐다. 낙태를 둘러싼 미국의 진통은 미국언론에 의해「낙태 내전」으로 일컬어질 만큼 70년대의 반전운동 이후 최대의 이슈로 부각돼 왔으며 73년 이른바「로 대 웨이드」케이스가 대법원의 판례로 기록에 올려진 후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돼 왔다.
「로 대 웨이드」 판례란 73년 대법원이 텍사스주의 한 가난한 미혼모가 낙태금지법에 묶여 아기를 낳고 입양시킨 후 제소한 사건의 판결을 통해 『임신 3개월 미만의 경우 낙태를 허용하되 이 시기가 지날 경우 주정부가 임신중절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을 말한다.
당시「해리·블랙먼」대법원 판사는『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여성자신이 낙태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폭넓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같은 대법원의 판례로 임신중절이 사실상 자유화된 가운데 낙태를 합법화해서는 안 된다 는 이른바 생명권파인 낙태 반대론자들은 16년 동안 꾸준히 조직적인 활동을 펴왔다.
낙태는 살인과 마찬가지로 선택적으로 인가할 수 없는 행위들 중의 하나라고 강조하는 이들은 낙태 시술소나 가두에서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침묵의 절규』라는 영화를 제작, 낙태의 비윤리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85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12주된 대아가 낙태수술로 자궁에서 떨어져 나갈 때 움찔하며 거부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태아의 움직임은 고통 때문이며 이는 곧 태아도 감정을 가진 하나의 인간임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낙태의 합법화를 지지하는 선택권파의 도전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지난4월 30만명 이상의 낙태 찬성자들이 수도 워싱턴에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매일같이 신문·TV를 통해 캠페인 광고공세를 펼쳤다.
여권운동단체의 기금으로 낙태수술 찬성 홍보비디오를 만들어 의원들에게 전달하기도하고 대법원이「로 대 웨이드」판례를 뒤집더라도 연방법이 계속 낙태를 합법화할 수 있도록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였다.
「케이트·마이클먼」전 미 낙태찬성운동 연맹(NARAL)사무국장은『낙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임신부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낙태한다』고 이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낙태를 불법화함으로써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뒷골목의 무허가 시술소를 찾아가 건강을 해치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는 막아야 한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미주리주는 86년 새로운 낙태법을 제정하면서 『태아의 생명은 임신초기부터 시작된다』는 내용을 법전문에 삽입함으로써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 전문자체는 구속력이 없으나 본문규정에서 주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의사나 병원은 낙태수술을 할 수 없으며 또 공공기금의 보조를 받는 의사는 임신부에게 낙태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에 맞선 한 출산보건소가 이 법에 이의를 제기, 법정싸움 끝에 이번 대법원의 판례가 나오게된 것.
대법원은 어렵게 다수의견으로 낙태관련 미주리주 법의타당성을 인정했지만 임신중절에 관해 딱 부러지게「허용 또는 반대」하는 대신 낙태를 위한 주 예산지출 및 의료시설활용 등을 엄격히 규제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낙태의 합법화를 결정한 73년의 판례를 완전히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주 정부들도 앞으로 미주리주와 같이 낙태요건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돼 낙태옹호자들의 입장이 크게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록 이번 판결에서 고배를 들기는 했지만 낙태 옹호론자의 입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 영향력 또한 지대해서 앞으로 낙태관련 대법원판결이 이번 판결을 번복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대법원판사 중 유일한 여성인 「샌드라·오코너」여사가 그 동안의 중도적 입장에서 낙태반대 쪽으로 돌아섬으로써 5대4라는 극적인 판결을 가능케 했다는 분석도 있어 「오코너」대법원판사의 향후 태도에 따라 판례 번복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의 건강권」을 내세우고 있는 낙태 찬성론자 들의 명분이 워낙 뚜렷한데다가 여론 역시 찬성목이 우세해 앞날을 예상하기는 더욱 어렵다.
미국인들의 절반 가량은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USA투데이지가 미국인 6백62명의 반응을 조사한 결과 50%가 이 판결에 반대한 반면 지지자는 40%로 나타났다고 7일 보도했다.
반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낙태 반대론자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당연한 귀결』이라며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프리섹스 물결에 일침을 가해 땅에 떨어진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판결이라고 환영하고 있다.
낙태 반대자이며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낙태금지를 주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부시」대통령도 즉각 환영성명을 발표하고 73년의 낙태 인정판례의 폐기를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무튼 앞으로 어떤 새로운 판례가 나온다 하더라도 낙태 찬반투쟁은 계속될 것이며 한해 평균 1백60만건에 달하는 미국의 낙태는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정봉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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