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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인 61명, 회사 실적 나쁜데 연봉 10% 이상 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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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영진에게 5억원 이상의 연봉을 지급한 국내 상장사 10곳 중 한 곳은 실적이 나빠졌는데도 연봉을 10% 이상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사주 일가는 사내에서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으면서 최고경영자(CEO)보다 연봉을 더 받았다. 이사회를 장악한 경영진이 성과 분배를 왜곡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고위급 경영인 연봉 비교 #미등기임원인 오너 명예회장 #회사 대표이사보다 많이 받기도 #“이사회가 성과 분배 왜곡” 지적 #기업 측 “창립 기여, 근속연수 감안” #“시장·주주 판단 따라 몸값 정해야”

중앙일보가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자료를 토대로 국내 주식시장에 상장된 2103개사를 전수 조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2016년보다 2017년 연간 기업 실적이 악화했는데도 지난해 최고위급 경영진에게 5억원 이상의 보수를 지급한 기업이 312개사에 달했다. 금융감독원 성과보상체계모범규준은 2018년부터 5억원 이상의 보수를 받는 임직원의 개인별 보수를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년도 실적이 나쁘면 경영 성과에 책임이 있는 최고위급 경영자도 다음 해 월급이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 중 49개사(11.7%)는 경영자 연봉을 10% 이상 인상했다. 여기서 연봉은 퇴직금 등 비근로소득을 제외한 수치다.

실적이 악화했는데도 임금 인상이라는 ‘혜택’을 누린 경영인은 49개 기업, 총 61명이다. 특히 실적 악화에도 임금을 두 자릿수 올린 경영자의 절반 이상(65.6%·40명)이 사주나 이들의 일가친척이었다. 2010년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 후 지난해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현대차그룹의 경우 2016년보다 2017년 현대차(-20.5%)·현대모비스(-48.9%)는 각각 순이익이 급감했지만 지난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현대차·현대모비스에서 받은 총보수(12억4900만원→22억1300만원)는 2배 가까이 늘었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9월 부회장에서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임금 책정 기준에 따라 보수도 올랐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두 자릿수 인상 66%가 사주 일가=같은 기간 ㈜효성의 영업이익(1조163억원→7708억원)은 24.2% 감소했다. 하지만 이듬해 효성은 조현준 회장(30억원·162.7%↑)과 조석래 명예회장(27억원·80%↑), 조현상 사장(15억1900만원·76.8%↑) 등 사주 일가의 연봉을 2배 안팎 인상했다. 또 한국타이어도 같은 기간 실적이 28.1% 나빠졌지만 사주 조양래 회장의 차남인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의 근로소득은 2배로 뛰었다(10억3900만원·102.5%↑).

효성그룹은 “조현상 사장은 지난해 6월 지주사 총괄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의 규모와 역할, 비중을 고려한 연봉을 인상했다”고 설명했고 한국타이어는 “조현범 사장이 지난해 1월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연봉이 올랐다”고 말했다.

미등기임원인 명예회장이 기업 경영을 책임지는 대표이사보다 거액을 받은 기업도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최창걸 명예회장에게 10억1000만원, 최창영 명예회장에게 5억5500만원을 지급했다. 이 회사 대표이사(이제중 부회장) 연봉은 5억2700만원이다. 이제중 부회장은 4개 계열사에서 회장 자격으로 계열사를 책임지면서 고려아연에서 부회장 업무도 수행한다. 5개사를 책임지고 경영하는 대표이사보다 명예회장에게 보수를 많이 지급한 이유에 대해 고려아연은 “회사 창립 기여도와 근속연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회사 대표이사인데 기업 실적 하락의 책임은 전문경영인이 지고 사주 일가의 소득은 오히려 올라가기도 한다. 2017년 순이익이 적자를 기록한 두산중공업은 대표이사 2인(정지택 부회장, 김명우 사장)이 옷을 벗었다. 지난해 88명의 임원 중 22.7%(20명)가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공동 대표이사인 사주(박지원 회장)는 근로소득(14억6300만원→15억4000만원)이 소폭(5.3%) 올랐다.

◆실적 하락 책임은 전문경영인 몫?=실적이 좋아져도 사주의 임금은 크게 오르는 반면 전문경영진의 임금은 찔끔 오르거나 동결되는 사례도 많다. 2016년보다 2017년 영업이익이 34.6% 오르자 두산인프라코어는 사주(박용만 회장)의 근로소득(22억4000만원)을 60% 올렸다. 그런데 같은 대표이사인 손동연 사장의 근로소득(6억5000만원)은 전년 수준으로 동결했다. 두산그룹은 “인사관리규정에 따라 영업이익, 지불능력, 시장경쟁력, 기여도, 직위와 직책 등을 고려해 급여를 산정한다”고 말했다.

이해하기 힘든 연봉 격차의 원인으로 전문가는 이사회 구조를 지적한다. 최고위 경영자 연봉은 주로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주가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영국과 달리 한국은 총수가 이사회 이사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사회를 장악하면서 기업을 경영하는 경우 많다”며 “최근 문제로 지적받는 사익편취·일감몰아주기·보수과다지급 등과 같은 문제는 이처럼 왜곡된 이사회의 구성에서 비롯한다”고 지적했다.

‘실적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시장의 기본 원리로 통한다. 하지만 주주를 대표해 경영을 맡은 경영자가 시장 원리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단순히 사주라는 이유로 최고경영자 연봉을 상대적으로 많이 인상하는 것은 주주자본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장기·단기적 성과를 기반으로 시장과 주주의 판단에 따라 경영인의 몸값이 정해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문희철·윤상언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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