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88)의 재판이 열린 11일 광주지법 안팎은 분노와 함성이 뒤섞였다.
동산초 학생들, ‘묵묵부답’ 전 전 대통령에 사죄 촉구 #“전두환 이제라도 사죄를”…광주 시민들 ‘인간띠’ #광주지법 시민들, 차분한 분위기 속…죗값 치러야
5·18 단체와 시민들은 이날 낮 12시33분 전 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광주지법에 도착하자 “전두환은 사과하라”를 외쳤다. 검은 세단에서 내린 전 전 대통령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법정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으시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어 다른 취재진이 손을 뻗어 “발포 명령 부인하십니까”라고 묻는 질문에는 “이거 왜 이래”라며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날 전 전 대통령의 광주지법 출석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당초 전 전 대통령 일행은 이동 중 점심을 먹고 오후 1시30분쯤 법원에 도착 예정이었으나 1시간여 먼저 도착했다. 광주지법 관계자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 일행은 한차례 휴게소에 들렀을 때 취재진이 접근하자 쉬지 않고 광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은 아무런 사과 표명 없이 법정으로 들어선 전 전 대통령을 향해 “전두환은 사과하라”를 외쳤다.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전 전 대통령에게 “재판마저도 꼼수로 받으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초등학생들도 시민들의 비난 행렬에 동참했다. 광주지법 맞은편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은 창문을 열고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쳤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 전 대통령의 도착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주먹을 내저으며 연신 노래를 불러 눈길을 끌었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너희들이 대한민국의 희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5월단체 회원들과 시민들 역시 말없이 법정으로 향하는 전 전 대통령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 이들은 법원 정문 앞에서 사죄와 처벌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차량 통행로 주변 양쪽으로 길게 줄지어 서는 인간 띠 잇기를 했다.
시민들이 손에 든 피켓에는 ‘전두환은 5ㆍ18 영령 앞에 사죄하라!’ ‘전두환은 5ㆍ18의 진실을 밝혀라’ ‘전두환은 역사왜곡 중단하라’ 등 문구가 적혀 있었다. 광주지법 정문 앞에는 ‘헬리콥터는 있는데 사격은 없었다?’ ‘5ㆍ18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을 단죄하라’ 등 현수막도 내걸렸다.
알츠하이머 등 건강 상태를 이유로 재판에는 출석하지 않고 골프를 친 전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피켓도 등장했다. 전 전 대통령이 허리를 숙여 골프를 치는 사진을 넣은 피켓에는 ‘본인이 말이야 알츠하이머다. 몇번 쳤지?’라는 문구가 담겼다.
전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80) 여사의 얼굴 사진을 넣은 피켓도 들고 나왔다. 이 여사의 얼굴을 합성한 피켓에는 ‘이십구만원’ ‘반민주화의 어머니’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 여사가 올해 초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데 따른 것이다. 이 여사는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단임을 이뤄서 지금 대통령들은 5년만 되면 더 있으려고 생각을 못하지 않느냐”며 이런 표현을 썼다.
이날 인간 띠 잇기 현장에 나온 박용해(59)씨는 “전두환이 온다고 해 치킨집 영업 준비도 미루고 왔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5월 영령과 광주 시민들 앞에 진정한 사과를 하기 바란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2017년 4월 펴낸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조 신부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가 기소됐다. 검찰은 2017년 4월 5·18단체와 조 신부 유가족의 고소를 토대로 수사한 끝에 전 전 대통령을 재판에 넘겼다.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기소된 후 건강상 이유와 관할지 이전 요청 등으로 법정에 출석하지 않자 지난 1월 구인장을 발부했다.
한편, 이날 광주에서 첫 재판을 받은 전 전 대통령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간단한 진료를 받은 뒤 연희동 자택으로 귀가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김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