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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비상한 시기엔 비상한 조치 취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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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침묵의 살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폐와 혈관, 뇌 속에까지 스며드는 미세먼지 얘기다. 과장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홍윤철 서울대 의대 환경의학연구소장은 초미세먼지로 인한 국내 조기 사망자 수가 한 해 1만1900명이라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6개월 줄어들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미세먼지 흡입으로 5일 안에 사망하거나 급성 질환에 걸리는 사람 수도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데이터를 다루는 전문가의 고뇌는 그렇다 치고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50대 중반의 주부한테서 들은 걱정은 절실하고 체험적이다.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1997년) 때도, 전쟁 위기설이 퍼져갈 때에도 이 나라를 뜨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미세먼지는 좀 다르다. 2세, 3세들에게 이런 나라에서 살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미세먼지 앞에 길 잃은 문재인 정부 #탈석탄이 최우선, 탈원전 족쇄 풀길

미세먼지는 비유하자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the clear and present danger)’에 해당한다. 미국 대법원은 공동체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닥칠 때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비상한 시기엔 비상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는데 옳은 말이다. 다만 그 비상한 조치라는 것이 장관들이 잔뜩 학교나 거리로 몰려나가 공기 정화기나 살수차 운행을 점검하는 식이었으니 맥이 빠진다. 이 시기에 취해야 할 비상한 조치라면 대통령이 선거 공약이라는 강박감에 급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미세먼지의 위험 앞에서 현실적으로 문제가 드러난 정책 하나 거둬들인다고 문 대통령을 책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탈원전이라는 게 애초부터 원자력 위험의 실체를 균형 있게 알리기보다 ‘판도라’ 영화 같은 공포 마케팅으로 여론을 일으켜 보자는 수단 아니었나.

전기 생산의 영역에서 미세먼지의 발생원이 석탄화력> 가스화력> 원자력=신재생의 순서라는 점은 증명된 사실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환경 정책가들은 미세먼지와 기후변화의 대책으로 탈석탄을 첫번 째로 꼽는다. 기후변화센터 창설자인 고건 전 총리는 “유엔 기후변화당사국 총회는 최우선에 탈석탄을 두고 신재생 에너지를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송영길 의원도 “신재생을 높여 나가되 중단시켜야 할 에너지원은 석탄화력> 가스화력> 원자력 순”이라고 정식화했다. 신재생은 탈석탄과 한짝이 되어야 하며 탈원전은 최후의 고려 대상이란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바람에 억지로 신재생과 짝을 맞췄다. 신재생의 짝이 탈석탄이 아니게 된 것이다. 억지 정책이 집행되자 탈원전으로 부족해진 전력을 석탄화력과 가스화력으로 메우는 바람에 석탄과 가스만 늘어났다. 이 정부가 말로만 탈석탄이지 실제론 석탄 사랑, 가스 사랑이라는 조롱이 나오는 까닭이다. 석탄과 가스를 사랑하면 미세먼지까지 초청하는 건 필연적 수순이다.

미세먼지를 해결하는 우선 순서가 탈석탄> 탈가스> 탈원전임은 자명하다. 미세먼지에 비상한 조치를 취한다면 탈석탄을 제1순위로 올리고 탈원전은 마지막으로 미루는 게 순리다. 탈석탄과 탈원전 두 마리 토끼는 관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 함께 붙잡는 건 불가능하다. 독일은 두 마리 토끼 중 탈석탄을 놓쳤다. 그 결과 갈탄 공화국이 됐으며 유럽에서 가장 나쁜 공기의 생산국이라는 오명을 안았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놓을 때가 됐다. 탈원전을 할 것인가 탈석탄을 할 것인가. 문 대통령이 스스로 발목에 채운 족쇄를 풀으시라.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