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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에 뿌리내린 "섬유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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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서쪽으로 2차선 해안도로를 타고가다 내륙으로 꼬부라져 3시간 가량을 달리면 바니공단에 다다른다.
바니공단은 도미니카정부가 야심만만하게 개발한 13개 프리존 (수출자유지역) 중의 하나로 8개 입주업체 가운데 3개가 한국기업이다.
공단안을 들어서면 정면에 도미니카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높이 걸려있고 우측에 군자산업, 좌측에 (주)한창, 그리고 뒤편에는 영우통상이 널찍한 공장터를 차지하고 있다.
원화절상과 임금인상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 카리브연안국가, 특히 도미니카로 쏟아져 들어오고있는 우리 섬유업체의 단면을 그대로 볼수있다.
현재 카리브연안국가에 진출한 업체는 재미교포기업을 합해 60여개. 과테말라의 18개를 비롯해 코스타리카 12개, 자메이카10개, 온두라스3개, 엘살바도르 1개등이며 도미니카에만도 16개기업이 자리를 잡았다.
지리적으로 미국과 가까운데다 임금이 극히 싸고 게다가 카리브연안국가의 공산화를 막기위한 미국의 CBI 정책(카리브지역 개발촉진책)의 일환으로 86년2월 「미국산원단으로 미국에서 재단한 반제품을 CBI 수혜국가에서 봉제한후 미국으로 재수출할경우」쿼타상의 특별우대를 하는 조치가 적용되면서 한국섬유업체의 진출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취재팀이 공단에 도착했을때는 마침 점심시간이라 공장앞 빈터는 공원들로 가득차 있었다.
도미니카 사람들은 다른 중남미국가 사람들과는 다른 얼굴이다.

<디스코음악 즐겨>
신대륙을 찾아나선 「콜럼버스」가 1492년 12월5일 도미니카에 역사적 첫 발을 내디딘뒤 원주민인 인디오는 백인이 몰고온 질병과 전쟁으로 말살되었고 스페인 정복자와 아프리카 흑인노예 사이의 혼혈로 새로운 인종이 구성되었다.
피부가 완전히 검지도 않고 황색도 아닌 코피에 밀크를 탄 색깔의 도미니카사람들은 흔히 물라토(Mulato)로 불린다.
중남미의 혼혈은 보통 셋으로 나뉘는데 물라토외에 칠레·콜롬비아·베네수엘라등의 스페인 백인과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족, 브라질·파나마등의 물라토와 인디오 혼혈인 잠보족이 있다.
군자산업 공장안을 들어서니 디스코풍의 경쾌한 음악이 귀청을 때린다.
중남미 어느 민족과 마찬가지로 도미니카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도 음악이 나오면 몸을 흔들 정도로 춤과 음악을 즐긴다.
취재팀이 바니공단으로 가는 길에 거친 판자집 투성이의 촌락에도 디스코테크가 없는곳이 없었다.
음악과 춤은 현지인들에게 생산성을 높이는 청량제 구실을 한다고 군자산업의 한종업원은 말했다.
공장은 8백여평 규모로 널찍했다.
종업원은 5백30명으로 10개 생산라인으로 나뉘어져 1개 라인에 50명씩 재봉틀을 돌리며 열심히 니트류의 티셔츠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는 관리직 사원이 된 한국에서 파견된 10여명 여공들이 현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기술지도를 하다 취재팀을 만나자 「안녕하세요」하며 반갑게 인사한다.
『군자산업은 한국에서 스웨터류만 자체생산하고 니트유는 하청생산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니트유 수출오더가 늘어나면서 자체공장을 가져야할 필요성이 절실했으나 원화절상과 임금인상등의 영향으로 도저히 한국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도미니카 진출이었습니다』
구길영사업본부장은 도미니카가 여타 카리브연안국가에 비해 진출에 몇가지 이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우선 도미니카는 시장규모가 가장 큰 미국 동·남부지역에서 가까운 지점에 있다는 것.
비행기로는 플로리다반도에서 1시간반 거리며 배편을 이용해도 산토도밍고에서 마이애미까지 평균 4일, 뉴욕까지는 7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또 도미니카 정부의 투자진흥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돼 프리 존이 계속 공급되고 있다는 점도 유리한 여건으로 꼽힌다. 현재 도미니카에는 13개 프리 존이 건설돼 2백20여개의 공장이 입주해있으며 8만5천명의 고용효과를 내고있다.
이밖에도 10개의 프리 존이 건설중이고 8개는 승인을 기다리는등 4천8백44만평방㎞의 좁은 국토를 전부 프리존화할 기세다.
기술과 자본이 모자란 도미니카는 1단계로 프리 존을 조성, 노동집약적 경공업위주의 외국기업을 유치함으로써 고용증대와 함께 기술축적을 꾀하고있는 것이다.
특히 노정치가 「발라게르」대통령을 중심으로 중남미 여타국가와는 달리 정부관리가 덜 부패해 경제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공단의임대료·전기료·각종부대비용이 무척 싸다.
실제로 최근 도미니카에 진출한 가미스포츠 (스포츠용품제작회사) 는 1만6천평방피트의 공장을 임대, 종업원 2백50명을 고용했는데 같은 조건의 코스타리카보다 경상운영비를 월 1만6천달러 절약할수 있었다는 얘기다.
도미니카는 또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다. 인구 6백70만명에 실업인구는 80만명으로 되어있으나 잠재실업인구까지 합하면 무려 2백만∼3백만명에 이른다.
실업인구가 같은 중남미권의 기업유치경쟁국인 코스타리카 전체 인구보다 많은 셈이다.
게다가 월 최저임금이 80달러에 불과하고 노동법이 노동자뿐아니라 기업주도 보호하는(노동자가 파업권을 갖고있는 대신 기업주는 해고권을 갖고있다)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는데다 특히 프리 존에서는 대통령령에 의해 노조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프리존」13곳조성>
이때문에 미국기업들이 일찍이 이곳에 진출, 2백20여개 진출업체 가운데 75%를 차지하고있으며 14개 CBI수혜국 대미 섬유수출량중 36·8%를 도미니카가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기업으로서는 뒤늦게나마 투자에 적합한 장소를 찾은 셈이었다고 구본부장은 말했다.
그러나 도미니카는 우리와는 문화적으로 상이한 지역으로 진출에 따른 어려움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종업원들이 잘 살아보자는 욕구가 부족합니다. 날씨가 더워 얼어죽을 염려가 없고바나나등 열대작물이 풍부해 굶어죽을 염려가 없다보니 악착같이 살아가는법이 없어 작업능률이 도무지 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군자산업이 입주한 바니공단은 미국기업들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곳으로 공원들 대부분이 처음 직장생활을 하기때문에 공과 사를 전혀 구별할줄 몰랐다고 구본부장은 설립초기의 어려웠던 일을 털어놓는다.
이때문에 출근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게다가 연휴가 끝나면 소리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않았다.
특히 일감이 밀려 잔업을 시킬때는 놀지않고 왜 일을해야되는지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설립 초기에는 하루근무의 절반을 종업원들에게 조직생활에서 지켜야할 사항을 하나씩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보내야 했다.
아침 7시50분이면 조회를 소집해 공지사항을 전달하고「오늘도 즐겁게, 사랑하라, 정과 성을 다하여」란 구호를 제창한뒤 구본부장이 직접나서 구호에 대한 배경설명을 한다.
그리고 전날 야간작업을 한 작업반을 불러세워 전종업원이 격려의 박수를 치게하고 3개월간 개근한 종업원들에게는 특별상을 수여한뒤 시상식 사진을 찍어 반드시 공장내에 붙이게 했다.
종업원들이 어느정도 직장생활에 익숙해지니 그다음에 문제되는 것이 생산성이었다.

<미기업들이 경계>
혹인들은 손바닥이 두꺼워 손재주가 엉망이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폈다하는 동작도못하는 사람이 적지않다.
이때문에 재봉틀과 같은 섬세한 작업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산성이 한국인의 80%는 된다지만 능률면에서 이보다 훨씬 떨어진다는것.
그렇다고해서 종업원들을 함부로 야단치지도 못한다.
이곳에서는 어깨에 손을 올려도 자칫 구타로 몰려 추방당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종업원을 야단칠때는 반드시 현지인 관리책임자를 통해 야단치게 하고 한국인은 입도 뻥끗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도 군자산업 도미니카 공장은 2년만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88년 수출액은 1천만달러로 회사 전체 수출액 1억달러의 10분의1을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인근 바라호나공단에 염색시설을 갖춘 제2공장 설립에 착수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애로 등장한 것이 미국의 수입장벽이었다. 미국의 코밑에서 종업원 5백명이상을 고용, 대량으로 물건을 쏟아부으니 미국인들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미국은 전년동기대비 30%이상 수출이 증가된 품목을 민감품목으로 지정하고 벌써13개 카테고리를 쿼타로 묶어 수입을 제한하고 있다.
군자산업이 생산하는 니트유도 더이상 수출이 급증하면 언제 쿼타에 묶일지 모른다. 멕시코에 컬러TV위주로 진출했듯이 도미니카는 섬유업체 일변도로 진출해 불필요한 위험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도미니카는 더 이상 한국섬유업체의 진출이 필요없는 곳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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