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저는 위안부라 불립니다"…재판부에 온 손편지 1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위안부라고 불렸던 23명의 생존 할머니 중 한 사람입니다. 저의 고향은 평양이고, 저는 13살에 일본에 의해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제 나이 이제 92살입니다. 저는 제가 죽기 전에 꼭 진실을 밝히기를 원합니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진실인 강제 연행을 인정했는지를 국민이 알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드립니다.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92) 할머니가 문용선 부장판사에 보낸 편지. 편지를 쓸 당시는 위안부 생존자가 23명이었으나, 지난 2일 고(故) 곽예남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다. 일본이 '강제 징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이, 일본의 만행을 증언할 증인들은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사진제공 송기호 변호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92) 할머니가 문용선 부장판사에 보낸 편지. 편지를 쓸 당시는 위안부 생존자가 23명이었으나, 지난 2일 고(故) 곽예남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다. 일본이 '강제 징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이, 일본의 만행을 증언할 증인들은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사진제공 송기호 변호사.

7일 공개된 이 편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92) 할머니가 손글씨로 써내려간 것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문용선 서울고법 행정3부 부장판사. 그가 이런 편지를 받은 까닭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28일 이뤄진 ‘한ㆍ일 위안부 합의 미스터리’를 풀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위안부 합의 미스터리, “진실을 알게 해주세요”

과거 2011년 당시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길원옥(오른쪽)와 지금은 고인이 된 김복동(왼쪽) 할머니.

과거 2011년 당시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길원옥(오른쪽)와 지금은 고인이 된 김복동(왼쪽) 할머니.

문 부장판사는 지난 2016년 2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송기호 변호사가 “위안부 합의 관련 협상 문건을 공개하라”며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 재판장을 맡고 있다.

송 변호사가 공개를 요구한 건 2014~2015년 14차례에 걸쳐 이뤄진 국장급 협의 과정을 기록한 문건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당시 위안부 ‘강제 연행’ 사실을 인정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한 것이다. 아베 일본 총리는 위안부 합의 당시 강제 징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발표했지만 그가 강제 연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에 위안부 징용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2017년 1월, 1심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은 “협상 문건을 공개하라”며 송 변호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외교부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고 사건은 서울고법으로 넘어갔다. 만일 문 부장판사도 ‘공개 정당’ 판결을 내린다면 대법원에서도 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1심 '협상 문건 공개 정당' 판결, 2심은?

송 변호사는 이날 항소심 재판 법정 앞에서 길 할머니의 편지를 공개했다. 송 변호사는 “앞서 1심은 피해자가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받았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합의 과정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외교부의 항소로 합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소장을 제출할 당시 40분의 할머니가 살아 계셨는데 이제 22분만 생존해 계신다”며 “외교부는 항소를 포기하고 이제라도 즉시 일본이 강제연행을 인정했는지 공개하라는 1심 판결을 이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길원옥 할머니는 13살 때 일본군에 끌려가 8ㆍ15 광복 뒤에도 분단이 되는 바람에 고향인 평양 땅을 밟지 못했다. 길 할머니는 지난 20여년 동안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를 돌며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16년에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세 차례나 소장 수령을 거부하면서 재판은 3년간 열리지 못하고 있다.

박사라ㆍ백희연 기자 park.sar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