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하노이 실언'에 다시 번지는 ‘웜비어 분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년 전 북한에 억류돼있다 풀려난 뒤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이 다시 미 정가의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의회는 북한의 국제금융망 접근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이른바 ‘웜비어법’ 처리에 속도를 내는 동시에 대북 인권 행보 강화에 나섰다.

하노이 회견서 김정은 감싼 발언 파문 확산 #미 의회 대북인권 행보 강화 움직임 #세컨더리 보이콧 의무화 '웜비어법' 재발의

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 상원은 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개인과 기업에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금융 제재)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다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웜비어가 사망한 해(2017년) 11월 상원 은행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지만 이후 진전되지 못한 채 회기가 만료돼 자동 폐기됐었다. 당시 웜비어를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따 ‘오토 웜비어 대북 은행업무 제한 법안’이라고 명명했다.

이 법안은 북한 정부와 거래하는 어떤 외국 은행도 미국의 은행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며 북한을 돕기 위해 국제사회의 제재를 회피하려 한 금융회사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조력자 역할을 해온 외국 금융기관을 정조준한 조치다.

법안을 공동 재발의한 팻 투미 공화당 의원은 성명에서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옵션 중 하나가 강력한 경제 제재”라며 “북한 정권이 핵 야망을 포기하는 것 외는데 다른 대안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회는 이와 함께 대북 인권 압박 행보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8일 마이크 코너웨이 공화당 하원의원이 발의한 ‘북한 수용소 철폐 촉구 결의안’은 지난달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4일까지 지지의원 수가 37명으로 늘어났다.

의회의 이 같은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웜비어 사건과 관련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 뒤 나왔다.

오토 웜비어. [AP=연합뉴스]

오토 웜비어. [AP=연합뉴스]

당시 트럼프는 김 위원장에게 웜비어의 사망 관련 언급을 했느냐는 질문에 “김 위원장은 그 사건에 대해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김 위원장이 이런 일을 허용했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김 위원장이)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그의 말을 믿겠다”고 말했다.

이후 여야의 질타가 쏟아지고 여론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했다. 행정부 관료들도 진화에 나섰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2일 그레이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인권 유린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며 웜비어 사망 사건에 대한 북한 책임론을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도 누가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북한 정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의 책임을 묻고 있다”고 말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거론하며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바로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도 CNN 등에 출연해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단지 김 위원장의 말을 전달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발언했지만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유엔 증언대에 선 오토 웜비어의 부모. [AP=연합뉴스]

유엔 증언대에 선 오토 웜비어의 부모. [AP=연합뉴스]

워싱턴포스트(WP)의 제이슨 레자이언은 “오토 웜비어는 트럼프를 영원히 괴롭힐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트럼프가 친밀함을 강조하며 독재자에 대한 의혹을 거부하는 등 죽음을 경시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미국인에 오래 기억시키도록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사람의 운명이 대통령의 기록에 중요한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가 사는 순간에 대한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에 피해는 되돌리기 어렵다”며 “웜비어와 (자말) 카슈끄지,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트럼프의 한심한 답변은 문제”라고도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잔혹하게 살해당했을 때도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진정한 애국자”라 평가하며 사우디를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여 공분을 샀다.

해외 여론도 좋지 않다. 영국 가디언은 “대통령의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등 독재 지도자들의 발언에 대한 신뢰의 표현과 유사했다”며 웜비어 부모를 포함해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고 썼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