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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돌」은 제거해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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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언제부터인가 분명치는 않지만 최근 우리말에 「걸림돌」이란 낱말이 나타나더니 이제 제법 일반화돼 쓰이고 있다.
특히 이 낱말이 5공청산이나 광주문제의 해결과 관련, 그 장애요인을 말할 때 거의 예외없이 쓰이고 있음에 유의해 본다.
여기서 「장애」 또는 「장애요인」이라는 낱말이 갖는 언어이미지의 추상성 또는 복삭적 애매 모호성과, 걸림돌이란 낱말이 품기는 구체성과 단삭적 명료성을 비교해보면 이 복합어의 유행에 함축된 또 다른 의미를 유추할수 있다.
6공 출범 이후 1년반이 가까워 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5공의 어두운 망령에 시달리며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국민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 시절의 불법·부정·비리따위에 대한 의혹이라기 보다는 이미 정체가 드러나 버린 사실의 확인과 이에 대한 관계자들의 책임승복및 반성과 사죄 또는 처벌인 것 갈다.
아직도 공식적으로 판가름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그 성격과 책임자가 누군가에 대해 국민들은 이미 결론을 내리다시피 돼있는 상태다. 그동안에 각종 대중매체들에 의해 시시콜콜히 파헤쳐진 사건의 내막과, 전국에 생중계된 국회청문회의 집중적인 시청이 판단과 결론의 근거를 충분히 제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질문자와 증인, 증언대에 나선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엇갈린 증언, 권력자와 방조자, 시혜자와 수혜자들의 증언속에서 누가 진실을 호소하고 누가 거짓을 강변하는가를 안 것이다. 자기의 책임을 면탈하려고 이치에 맞지 않는 어거지를 부리며 태연을 가장하는 자, 터무니 없는 궤변으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국민을 기만하던 자들을 보면서 무엇이 진실이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다 알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국민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하고 책임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딱 잡아떼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들을 민주화와 5공청산의 「장애」라는 추상적 낱말보다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걸림돌」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 같다.
몇몇 주요 관련자가 구속되기도 하고 더러는 국회의 고발을 받기도 했으나 어느 한사람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일이 없고 고발된 사람들도 슬금슬금 빠져나가 흐지부지 될것같은 예감이다. 그러나 그렇게 얼버무려서는 우리의 사회가 안정될수 없고 따라서 정국또한 바람잘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5월만 가면 조용해 질줄 알았던 학원가의 소요를 보면 안다.
또 6·25가 30년도 훨씬 지난 이마당에 「좌경」은 무엇이며 「용공」이 웬말인가. 종주국마저도 내팽개친 사회주의 이념 따위를 난데없이 주워들고 나와 주체사상이니, 김일성찬양이니 하며 학생들이 시대착오적 망상에 집착하는 원인을 심각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창자속 밑바닥까지 모두 들여다보이는 허위보다는 차라리 실체도 잘 모르는 허상에라도 매달려 보려는 젊은이들의 갈데 없는 마음을 불순한 철부지로 야단치기에 앞서 차라리 안쓰럽고 슬프게 생각하는 시각을 터무니없는 감상주의라고 매도할 수만도 없을 것이다.
5공을 청산하고 「광주」를 해결하는 일은 사회불안을 가라앉히고 역사를 성큼 앞서가게 하는 선결과제다. 이 과제를 푸는데 있어 걸림돌은 사실의 규명과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못하는데 있다.
전두환·최규하 두 전직대통령은 국민앞에 나와 증언하지 않으면 안된다. 두사람이 이나라를 통치하던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그 하위자들이 『나는 아니다』『나는 모른다』로 일관하고 있으므로 당시의 최고 통치자가 사실과 책임의 소재를 밝히는 증언을 해야한다.
죽은자의 해원을 위해 백일기도를 마쳤다면 이제 4천만의 살아있는 국민을 위해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에 나서야할 차례다. 국민의 대의기관인(국회의 여야중진들이 두사람의 증언을 듣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국민의 결정이다. 따라서 아무런 조건없이 증언에 나서는 것이 국민의 뜻에 따르는 길이다. 『국민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전씨측은 증언을 하되 단한번으로 하고 증언이후에는 5공청산에 대한 논란을 다시 안한다는 선행조건을 내세우고 있다고 전해진다. 증언이 성실하고 완벽하다면 두 번 다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책임자가 밝혀지면 논란의 여지도 없어질 것이다.
최씨는 대통령의 증언이 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긴다는 점, 증언이후 정국이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들어 증언에 반대한다고 들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보다 우위에 있는 직위는 없으므로 국민 앞에서의 증언이 나쁜 선례일 수 없으며 증언을 안해 청산되지 않고있는 5공의 망령때문에 시달리는 6공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 우선할 정국걱정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증언결과에 따라서는 문제를 매듭짓기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킬수도 있다는 걱정도 들린다. 그렇다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비밀을 국민에게 숨기고서는 그 정권의 도덕성이나 정통성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은 접어두자는 말인가.
현재로서 5공청산의 최대 걸림돌은 두사람 전직대통령의 대국민증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걸림돌」은 그 정체가 구체적이며 따라서 제거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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