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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호텔’ A380, 시장을 이기지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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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4면 메인 A380

14면 메인 A380

한 번에 승객을 최대 800여 명 실어나를 수 있는 세계 최대 여객기, 2층 구조에 바(bar)와 스위트룸까지 둔 ‘하늘 위 호텔’로 불리는 에어버스의 A380 여객기가 불명예 조기 퇴역한다. 유럽 최대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는 2021년을 끝으로 A380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지난 14일(현지시간) 발표했다.

14년 만에 날개 접는 까닭 #보잉 747 대항 에어버스 야심작 #최대 800명 좌석 채우기 힘들고 #저비용 항공사에 경제성 밀려 #“주문 없어” 2021년 생산 중단

톰 엔더스 에어버스 최고경영자(CEO)는 성명을 통해 “A380 판매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문이 없어 생산을 유지할 근거가 없어졌다”며 “오늘 발표가 고통스럽다”고 밝혔다. 총 180억 유로(약 23조원)를 투자한 초대형 프로젝트가 2007년 첫 상업 비행 후 14년 만에 폐지되는 것이다.

A380 프로젝트는 장거리용 초대형 항공기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 보잉의 B747에 도전하기 위한 에어버스의 야심이었다. B747이 50년째 운항 중인 점과 비교하면 A380을 14년 만에 접는 것은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장기 계획과 막대한 투자가 이뤄진 A380 프로젝트가 기대를 저버리고 단명하게 된 이유는 뭘까.

우선 태어난 해가 불운의 시작이었다. A380 프로젝트는 1988년 처음 구상해 90년 에어버스의 새로운 장거리 항공기 개발 계획으로 공식 발표됐다. 2000년 개발을 시작했으며, 배선 장치 등 기술적 문제로 상용화가 2년 미뤄진 끝에 2007년 10월 싱가포르항공이 처음 하늘에 띄웠다. 세계 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빠져들 때였다.

이듬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를 덮쳤다. 기업과 개인 모두 긴축으로 돌아서면서 세계 여행 수요는 급감했다. 지출을 바짝 조인 항공사들도 초대형 여객기가 꼭 필요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문량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당초 구매를 약속한 항공사의 구매 취소도 나오기 시작했다.

에미레이트항공의 A380 기내 퍼스트클래스에는 바(bar)가 설치돼 있다. 에어버스는 A380 제작을 2021년 이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AP=연합뉴스]

에미레이트항공의 A380 기내 퍼스트클래스에는 바(bar)가 설치돼 있다. 에어버스는 A380 제작을 2021년 이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AP=연합뉴스]

큰손은 두바이공항을 거점으로 한 에미레이트항공이었다. A380 232대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09대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A380의 ‘호흡기’를 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초 162대 구매를 약속했는데, 최근 이를 123대로 줄였다. A380 수주 잔고는 53대에서 14대로 급감했다. 남은 14대를 2021년까지 인도하고 나면 수주 잔고는 ‘0’이 된다. A380은 연간 40대 이상 제작이 목표였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12대를 생산했다.

둘째는 시장 선두업체를 추격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전략이었다. A380은 초대형 여객기 시장을 독식하고 있던 B747의 대항마로 제작됐다. B747은 50년간 1500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에어버스는 A320 같은 소형 여객기 시장은 꽉 잡고 있었지만, 장거리 초대형 기종에서는 보잉이 압도적이었다. 미국을 상징하는 보잉과 유럽의 상징인 에어버스의 대결 구도에서 에어버스가 초대형 기종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A380을 개발하게 됐다.

대한항공 A380 제원

대한항공 A380 제원

블룸버그통신은 “A380은 항공기 그 이상이었다. 유럽 협력의 상징이자 산업적 야심의 표상이었다”고 평가했다. A380 날개는 영국, 부품은 프랑스·독일, 기체는 프랑스 툴루즈, 도색 등 마무리 작업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진행됐다. B747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공간과 럭셔리한 시설을 내세워 보잉의 질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더 크고, 더 안락한 데 집중한 전략은 승객들의 지지는 얻었지만 정작 고객인 항공사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유가가 오르고 항공 수요가 줄어들자 초대형 항공기의 운영·관리 비용은 부담이 됐다. A380은 항공사 요청으로 보통 500여 개 좌석에 바와 면세점, 스위트룸, 샤워실 등 편의시설을 만든다. 항공사 입장에선 500여 석을 판매하는 게 큰 부담이다. 초대형 항공기는 배치할 수 있는 노선이 한정적이어서 운영 효율성도 떨어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좌석당 운영 비용은 A380 같은 초대형 여객기보다 B787 드림라이너 같은 최신 소형 기종이 적게 든다”며 “최근 10여 년 새 여객기 시장 판도가 확 바뀌었다”고 전했다.

초기 도입한 항공사들이 A380을 되팔 수 있는 ‘중고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것도 판매 부진 요인이다. 중소형 항공사나 개발도상국에서 구입하기에 너무 크고 시설이 따라주지 않아 판매가 어렵다. 싱가포르항공이 초기에 구입한 A380 2대는 2차 판매가 불발돼 부품으로 해체됐다.

셋째는 미래시장 변화를 잘못 읽은 탓이다. 에어버스는 국제 여행 수요가 큰 폭으로 늘면 지역 거점인 허브(hub) 공항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공항 혼잡도가 높아지면 초대형 항공기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전망했다. 공항이 혼잡해지면 공항당국이 항공사들에 초대형 항공기 도입을 압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망의 일부는 맞았다. 중동의 허브인 두바이공항을 거점으로 한 에미레이트공항이 A380 생산량의 절반을 운영하는 큰손이 된 데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싱가포르항공(19대), 루프트한자(14대), 영국항공·콴타스항공(12대), 대한항공·에어프랑스(10대), 아시아나항공(6대) 등도 A380을 들였지만 소량에 그쳤다.

전망의 큰 그림은 어긋났다. 런던 히스로공항과 같이 혼잡한 공항은 A380 존재를 반겼지만 에어버스의 예측과 달리 대부분 공항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공항을 새로 만들거나 확장·증설하는 경우가 많고, 허브 공항에서 환승하는 대신 소도시와 소도시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저비용 항공사가 획기적으로 늘어 항공산업의 중요한 축이 됐다. 시장은 반대로 흘러간 것이다.

보잉의 B777과 그보다 작은 B787 드림라이너, 에어버스의 A330 네오와 A350 같은 트윈 엔진 소형 여객기 인기가 올랐다. 초경량 탄소섬유 기체와 효율 높은 엔진으로 연료 비용을 절감하고, 소도시와 소도시를 잇다 보니 회전율이 높아 경제성이 좋기 때문이다.

보잉의 행보는 에어버스와 달랐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래 항공 여객 시장은 허브 공항을 거치지 않고 도시와 도시를 직접 연결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했다. 장거리 여객기도 소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B777, B787 드림라이너 등을 개발했다. 결국 A380이든 B747이든 초대형 항공기의 생존이 어려워졌다. WSJ는 보잉도 B747 생산을 2022년께 중단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A380의 고전에도 불구하고 에어버스는 탁월한 실적을 냈다. 지난해 매출액이 637억 유로(약 81조원)로 전년 대비 8% 증가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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