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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뒷바라지에 올인한 딸바보… '빈손' 노후 어쩌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39)

평범한 가장인 이명석씨는 외동딸에게 모든 것을 올인했다. 딸이 유명 사립학교에 진학하며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며 고민이 깊어졌다. [사진 pixabay]

평범한 가장인 이명석씨는 외동딸에게 모든 것을 올인했다. 딸이 유명 사립학교에 진학하며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며 고민이 깊어졌다. [사진 pixabay]

이명석(53) 씨는 대학 2학년인 외동딸이 있다. 평범한 급여생활자임에도 하나뿐인 딸에게 모든 것을 올인했다.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려고 유명한 사립학교에 진학시켰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같은 반 아무개가 재벌 집 손자이고, 누구는 병원장 딸이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역시 판단을 잘했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다른 아이들과 수준을 맞추려다 보니 본인의 경제력에 비해 지출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계산해 보니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억대가 넘는 돈을 투자했다. 중학교 진학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목고를 진학시키기 위해 경시대회에 참가하고 학원에 다니게 하면서 많은 투자를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또다시 혹독한 대학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본인이 그렇게 원하던 의대 진학은 못 했지만 그래도 눈높이에 맞는 대학에 진학했다. 딸은 어느 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어학연수 보내달라는 딸의 말에 충격

딸에게 어학연수 이야기를 듣고 드는 생각이 이제까지 하나뿐인 딸아이 교육에 투자한 것은 괜찮았지만, 막상 자신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한심했다. 그 좋아하는 술도 자제하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정작 자신을 위해 준비하거나 투자한 것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자동차를 바꾸려고 펀드에 월 50만 원씩 투자한다”, “노후 자금 마련을 위해 50만 원짜리 연금에 가입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이씨는 딸이 취업 스펙을 위해 미국에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노후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딸의 취업, 결혼까지 준비하려니 정말 막막했다. [사진 pixabay]

이씨는 딸이 취업 스펙을 위해 미국에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노후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딸의 취업, 결혼까지 준비하려니 정말 막막했다. [사진 pixabay]

그는 할 이야기가 없어 딸 자랑, 딸이 다니는 학교 자랑만 한다. 친구들은 이 씨가 전형적인 딸 바보라고 놀리곤 한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노후를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하게 된다. 게다가 어학연수를 가는 이유가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적어도 딸이 다니는 정도의 대학이면 취업에 대한 걱정을 없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누구는 자녀 결혼식 비용으로 호텔 예식비만 몇억을 썼다”고 했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대출 낀 집 말고는 준비된 자산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딸 아이를 결혼시키기 위해 있는 집마저 처분하게 되면 부부는 노후에 거리에 나앉든가, 임대주택에서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위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이가 하나라는 사실이다. 만일 아이가 둘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중장년 퇴직자가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은 아이들 교육비와 앞으로의 결혼자금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보험개발원이 발간한 ‘2018 KIDI 은퇴 시장 리포트’에 따르면 40~50대 10명 중 6명은 은퇴 후에도 자녀부양에 대한 걱정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 후에 예상되는 자녀 교육비는 7258만원, 자녀 결혼비는 1억3952만원으로 자녀부양이 노후 준비에 상당한 부담요소로 작용했다.

우리나라 직장인이 주된 직장에서 퇴직하는 나이는 평균 49.1세로, 이는 자녀가 대학에 진학했거나 진학을 앞둔 때다. 자녀가 취업 후 돈을 모아 결혼자금과 전셋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으니 자연히 부모의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요즘 중장년은 부모와 장성한 자녀를 모두 부양하는 '더블 케어 세대'라고 불린다. 문제는 이들의 노후 준비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중앙포토·연합뉴스]

요즘 중장년은 부모와 장성한 자녀를 모두 부양하는 '더블 케어 세대'라고 불린다. 문제는 이들의 노후 준비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중앙포토·연합뉴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처세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인데 요즘은 ‘더블 케어 세대’로 말이 바뀌었다. ‘부모를 부양하면서, 동시에 장성한 자녀도 부양하는 세대’라는 말이다.

문제는 지금 반퇴 세대인 중장년 은퇴자가 양쪽을 다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앞서 인용했던 보고서에 따르면 노후준비 방법은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이 1순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017년 기준 국민연금 수급자의 소득대체율은 20.8%에 그친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비은퇴자가 희망하는 노후소득은 은퇴 전 소득의 64.3% 수준으로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 쓸 곳은 많은데 쓸 돈은 부족하고, 은퇴 후 적어도 40년 이상 돈을 쓰면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지금 현재 자산이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벌면 된다. 의욕은 좋지만, 퇴직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자산을 늘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고수익을 바라면서 잘못 투자했다가 원금을 손해 볼 가능성만 커진다. 또 돈을 쓰는 기간을 줄이는 방법이 있지만, 사람의 수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쓸 곳을 줄이는 것이다.

자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2019년 대한민국 중장년 반퇴 세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은퇴 후 삶을 설계하면서 자녀에 대한 변수는 제거하는 것이 옳다. 현실적으로 자녀 부양까지 하면서 내 노후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그동안 모아둔 자산이 많아서 상속세와 증여세를 걱정해야 하는 행복한 중장년 반퇴 세대는 그에 맞는 올바른 해결책을 찾자. 하지만 나의 노후생활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준비된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을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하고 똑같다.

장성한 자녀로부터 심리적 독립해야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경제적이건 정서적이건 챙겨주려고만 하지 말고, 자녀와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자. [사진 Shutterstock]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경제적이건 정서적이건 챙겨주려고만 하지 말고, 자녀와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자. [사진 Shutterstock]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자녀와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 부모가 등록금과 결혼자금에 대해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합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입학을 축하한다. 엄마, 아빠는 네게 학비와 결혼자금과 관련해서 8000만원까지 지원해 줄 수 있다. 만일 네가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 등록금을 2000만원만 사용한다면 나머지 6000만원을 네 결혼자금으로 보태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등록금을 6000만원 사용한다면 네 결혼자금은 2000만원을 보태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 부모는 성인 자녀에게 돈과 관련해서는 너무 관대하다.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 정도의 경제관념은 심어줘야 한다.

부모·자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든 자녀로부터 부모가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장성한 자녀의 삶에 대해 걱정하지 말자. 우리 아이들은 너무도 똑똑하다. 경제적이건 정서적이건 챙겨주려는 생각하지 말고 또 자녀들에게도 경제적으로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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