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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황혼부부 '한지붕 두가족'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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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01년 현재 한국 여자의 평균 수명은 80.01세. 남자는 72.84세로 나타났다. 이달 초 통계청의 발표 결과다. 남녀 평균 수명 76.53세는 천수를 누리면 80~90세를 넘겨 살게 된다는 얘기다. 사오정(45세가 정년).오륙도(56세까지 근무하면 도둑)를 들먹이는 분위기니 정년 후 30년 안팎을 부부가 집안에서 함께 놀며 살아야 한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고 갈등도 많아 속앓이를 하는 노인부부도 많다고 한다. 오는 10월 2일은 노인의 날. 이를 계기로 삐걱대는 노년부부 관계를 진단해본다.

◇"숨소리도 듣기 싫어"= 3년 전 퇴직한 박철환(가명.62)씨는 아내 김정자(가명.58)씨와 1년 전부터 '한지붕 두가족' 생활을 한다. 45평형 아파트를 딱 반으로 나눠 방 2개와 화장실을 각각 사용한다. TV.전화도 각자의 것을 쓴다.

-김씨="남자는 정년이라도 있지, 여자는 평생 남자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요. 퇴직한 뒤부터 '가계부 써라''또 어딜 가느냐'며 사사건건 간섭합니다. 게다가 물 한그릇까지 갖다 바쳐야 하니…. 나도 이제 행복해질 권리가 있잖아요?"

-박씨="내가 평생 벌어먹여 살리다 이제 돈을 못 번다고 그렇게 괄시할 수 없어요.내가 일할 때 아내는 헬스클럽이다 동창회다 다니고선 이제는 같이 놀기 싫답니다. 억울한 생각만 들어요."

환갑을 눈앞에 둔 주부 황명희(가명.서울 신사동)씨는 "퇴직한 남편에게 미운 마음이 생기니 어느날 옆에 자던 남편의 숨소리도 듣기 싫어졌다"고 털어놓았다.

황씨가 동창회에서 전해들은 우스갯소리 하나. '(부부가) 30대엔 마주보고 자고, 40대엔 천장을 보고 자고, 50대엔 등 돌리고 자고, 60대엔 각 방을 쓰며, 70대엔 어디서 자는지도 모른다'는 것. 황씨는 "모든 친구가 박장대소하며 공감했다"고 말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 4~5월 전국의 60세 이상 여성노인 4백4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도 황혼기 부부들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조사 결과 여성노인들이 가족 구성원 중 가장 갈등 관계가 심한 사람은 배우자로 나타났다.

갈등의 정도는 함께 사는 자녀나 며느리보다 훨씬 심했다. 친밀감도 낮고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았다. 배우자와의 친밀감은 손자녀나 자녀, 형제.자매보다 낮았다.

의사소통은 세대가 다른 친손자녀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신연희 연구위원은 "조사대상의 절반 정도가 상담소의 내담자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년기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갈등이 심한 경우는 황혼이혼으로 치닫기도 한다. 2002년의 경우 20년 이상을 살고도 이혼한 부부가 2만3천쌍으로 전체 이혼의 22.8%나 된다(통계청 자료). 10년 전과 비교해 8배나 많은 수치다.

◇평생 엇박자 결혼생활= 성신여대 김태현(가족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젊었을 때 확실히 구분되는 부부 간의 성역할과 폐경기 이후의 호르몬 변화 등이 노년기 부부 갈등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젊었을 때 가정에 머물던 아내는 아이들의 진학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자유로워지려 한다. 대체로 이 시기에 여성은 폐경기를 겪으면서 여성 호르몬 수치가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남성 호르몬의 수치가 높아지면서 태도나 말이 독립적.공격적으로 된다.

반면 바깥 생활에 치중하던 남편은 퇴직기를 전후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면서 가정으로 되돌아온다. 아내의 외출을 싫어하고 간섭도 늘어난다.

하지만 부부 대화에 익숙지 않고 대화의 기술도 없어 아내와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 몸에 밴 명령적 어조나 아내를 억누르려는 태도 또한 하루 아침에 변하지 않아 아내와의 불화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

호남대 한혜경(사회복지학과)교수는 부부가 함께하는 놀이문화의 부재도 원인 중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젊었을 때 주로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리던 남편일수록 아내의 취향이나 취미생활을 잘 몰라 노년에 함께 놀기가 어렵고 따라서 친밀감도 낮아진다.

◇노년 준비 재교육 절실=주부 권순자(58)씨는 "정년을 앞둔 남편들을 위한 노년 준비 재교육이 절실하다"며 "동창모임에서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 전했다. 남편.아내 이해하기, '부엌맹(부엌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탈출하기, 부부 취미생활 함께하기 등 노년을 예행연습할 수 있는 사회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신위원은 "노인대학을 열면 대체로 할아버지들이 참가하지 않는다"며 "현재로선 아내를 이해하려는 남자 노인들의 노력이 더 필요하며 할머니들도 남편을 좀더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교수는 성역할을 구분하지 않는 양성적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처방이라고 조언했다. 젊었을 때부터 집안일.바깥일을 구분하지 않고 취미생활도 남녀가 따로 하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 또한 갑작스러운 노후대비보다는 젊었을 때부터 인생을 설계해야 할 것이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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