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공무원 없는 모래 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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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한국 경제에 반도체가 없다면…. 난감하다. 단순 수치로 따져도 그렇다. 지난해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의 비중은 20.9%였다. 자동차·조선 등 주력 산업의 고전에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됐다. 삼성전자는 2017~2018년 2년 연속 전 세계 반도체 매출 1위를 기록하며 ‘반도체 원맨쇼’에 앞장섰다.

한국에서 반도체가 성공한 비결은 뭘까. 우스갯소리처럼 회자되는 답이 있다. “정부 관리가 반도체를 모를 때 시작해서”다. 정부 규제가 없을 때 사업을 시작해 성공했다는 말이다. 공무원 조직이 반도체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각종 ‘규제 시집살이’에 될 일도 안 됐을 수 있다는 뉘앙스다. 정부를 향한 기업의 요구는 한결같다. 규제 완화다. 사회 전체를 위해 필요할지라도 새로운 사업이나 서비스를 시작하는 기업에 각종 규제는 거추장스럽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에 발목 잡혀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다.

이런 기업에 정부가 숨구멍을 터줬다.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다. 신(新)산업 육성을 위해 기업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치도록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해 주는 제도다. 기업은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의 효용성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정부는 문제가 있으면 사후에 규제한다. 2016년 영국에서 핀테크(Fintech) 산업 육성을 위해 처음 도입된 뒤 일본 등 각국에서 이 제도를 운영했다.

샌드박스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가정집 뒤뜰에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공간을 설치해 모래를 담아 놀게 한 상자다. 게임용어로 샌드박스는 사용자가 정해진 틀이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뜻한다.

얽매임 없는 규제 샌드박스는 반(反)기업 정서 속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업 정책에 속 끓였던 기업에 날아든 낭보다. 기업은 반색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업융합 분야)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ICT분야), 금융위원회(금융분야)에 기업의 신청이 이어졌다. 우선 산업부(11일)와 과기부(14일)가 첫 규제 샌드박스 대상을 선정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8일 “규제 샌드박스 1호 승인을 계기로 산업 현장에서 새로운 시도와 혁신이 화수분처럼 솟아나도록 정부가 힘써 달라”고 말했다. 반도체 같은 화수분까지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척박한 모래에서 혁신의 꽃이 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물론 전제 조건이 있다. 모래 상자를 건드리지 않는 공무원의 무관심이다. 일단 그 약속만이라도 지키면 된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