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도시로 변한 군산 '어느 가족' 4인의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1층 한 회의실에서 실직자 가장 4명이 어깨동무를 한 채 재취업을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전모(37·여)씨, 유모(53)씨, 홍모(35·여)씨, 이모(59·여)씨. 같은 회사에 다닌 이들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의 주인공들과 닮았다. 김준희 기자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1층 한 회의실에서 실직자 가장 4명이 어깨동무를 한 채 재취업을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전모(37·여)씨, 유모(53)씨, 홍모(35·여)씨, 이모(59·여)씨. 같은 회사에 다닌 이들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의 주인공들과 닮았다. 김준희 기자

전북 군산은 '유령 도시'로 불린다. 최근 2년 사이 지역 경제를 지탱하던 두 기둥이 무너져서다. 현대조선소와 GM공장이 문을 닫자 다른 회사들도 줄줄이 폐업했다. 수많은 가장이 직장을 잃었다. 설 연휴를 앞둔 실직자 가장들의 마음은 어떨까.

[르포]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가보니 #실업급여 신청한 실직자 25명 교육 받아 #지난해 11월 폐업한 식품회사 동료 4명 #나이·출신 달라도 생계 책임지는 가장들 #"엄마·큰오빠·언니·막내처럼 서로 챙겨" #일본 영화 '어느 가족' 주인공들과 닮아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1층. 남녀 25명이 서류를 들고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실직자 교육을 받은 직후다.

대부분 표정이 어두운 가운데 유독 서로 챙기는 4명이 눈에 띄었다. 유모(53)씨와 이모(59·여)씨, 전모(37·여)씨, 홍모(35·여)씨다. 기자가 '가족인 줄 알았다'고 하자 이들은 "저희는 가족같이 재미있게 일했다"고 했다.

유씨 등은 같은 회사에 다녔던 동료들이다. 고구마 가공 업체에서 1년 8개월간 한솥밥을 먹었다. 지난해 11월 회사가 문을 닫자 한꺼번에 실직자가 됐다. 하루아침에 수입(월130만~140만원)이 끊긴 이들은 지난해 12월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최장 8개월간 매달 150만원(최저임금 기준)을 받으면서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김준희 기자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김준희 기자

이들은 "GM공장 폐쇄로 군산 경기가 안 좋아져 회사가 타격을 입었다"고 입을 모았다. 저마다 나이와 출신은 다르지만, 각자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점은 공통점이다.

평생 섬에서 어부로 살다 자식들 공부시키러 육지에 나온 50대 남성(유씨), 자녀들 도움 안 받으려 일하다 암에 걸린 50대 여성(이씨), 아들 넷에 손자까지 둔 베트남 출신 30대 여성(전씨), 홀로 가족을 부양하며 결혼까지 포기한 30대 여성(홍씨)…. 이들은 서로를 가리켜 '엄마', '큰오빠', '언니', '막내'라 칭했다.

유씨는 네 식구의 가장이다. 개야도에서 30년간 주꾸미와 멸치 등을 잡던 그는 7년 전 육지로 터전을 옮겼다. 그는 "아들들은 크는데 섬에는 학교가 없어 다 때려치우고 (섬을) 나왔다"고 했다.

동료들은 "유씨가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귀띔했다. "대학생인 두 아들이 장학금을 골라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해 학비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씨는 당장 설 연휴부터 걱정이다. 장남인 그의 집에 온 가족이 모이는데 부모님 용돈이며, 조카들 세뱃돈을 챙겨야 해서다. 그는 "돈을 꿔서라도 세뱃돈은 줄 것"이라면서도 착잡한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 유씨는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이 없어 일자리 찾기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1층 한 회의실에서 실직자 교육을 마친 사람들이 직원에게 관련 서류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김준희 기자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조촌동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1층 한 회의실에서 실직자 교육을 마친 사람들이 직원에게 관련 서류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김준희 기자

이씨는 사글셋방에 혼자 산다. 그는 자식들한테 손을 안 벌리려고 일을 했다고 한다. 장성한 1남1녀는 전주에 산다. 이씨는 "이번 설에는 자식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직장을 잃은 데다 최근 갑상선암 수술을 받아서다. 그는 "혼자 벌어 살기도 빠듯한데 자꾸 아픈 데가 생겨 돈을 모으기가 어렵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온 전씨는 아직 30대지만 '할머니'다. 아들만 넷인데, 그의 큰아들(20)이 결혼해 손자를 봐서다. 화물차 운전기사인 남편이 한 달에 200만원 남짓 벌지만, 대가족 생계를 꾸리기엔 역부족이다. 그가 회사를 다닌 이유다. 그는 "설 연휴에 시댁(전남 신안)에 내려가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동료들은 홍씨를 '소녀 가장'이라 불렀다. 미혼인 홍씨 혼자 일하며 한집에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기 때문이다. 군산 토박이인 홍씨는 14년간 수도권에 있는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15년쯤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저밖에 돈 벌 사람이 없다"며 "경제적 부담 때문에 결혼은 포기했다"고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일본 영화 '어느 가족'에는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지내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이날 만난 실직자 가장들이 그랬다.

이들의 꿈은 뭘까. 유씨가 대표로 말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될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전북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한국GM 군산공장은 군산 지역 총생산액의 26%, 수출의 43%를 차지했다. 2017년 7월 현대조선소 가동 중단 이후 1년 만에 협력업체 64개가 폐업하고, 50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지난해 5월 GM공장 폐쇄로 2000여 명이 실직했다. 협력업체 164개가 폐업 위기에 몰려 직원 1만여 명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군산 인구도 줄었다. 2016년 12월 27만7551명에서 지난해 11월 27만2798명으로 4753명이 감소했다. 인구 유출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이어져 군산 지역 임대아파트의 11% 이상이 빈집이고, GM공장 주변의 원룸 공실률은 70%에 달한다. 소비 악화로 상가 매출 및 유동 인구도 감소했다. 요식업 휴·폐업 신고는 2015년보다 지난해 43% 급증했다.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소룡동 한국GM 군산공장 정문. 김준희 기자

지난달 31일 전북 군산시 소룡동 한국GM 군산공장 정문. 김준희 기자

군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