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총리가 보이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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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판교 학원단지'라는 용어는 정부의 9.5 주택가격안정대책에서 비롯됐다. 강남 집값이 학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판교에 서울 강남의 유명 학원을 유치하겠다는 취지였다.

사흘 후 우수 학원에 토지분양가 인하와 세제혜택을 준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 열흘 후 교육혁신위원장이 학원단지 반대 입장을 밝혔다. 뒤이어 설익은 아이디어 차원의 정책추진은 잘못됐다고 대통령이 교육부총리를 질책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국회에 나온 교육부총리는 부처간 협의도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학원단지는 반대한다고 했다. 학원단지가 백지화 쪽으로 기울자 재경부 차관이 곧이어 반격에 나섰다.

학원단지는 부적절한 용어고 교육집적지(에듀 파크)다. 여기엔 학원뿐 아니라 자립형 사립고.특수목적고.서점 등 다양한 교육부문이 배치되는 것이며 에듀 파크는 땅 문제인 만큼 교육부 소관도 아니며 백지화가 된 것이 아니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 발뺌하고 책임 미루는 졸속정책

주택과 교육 문제는 전국민의 관심사다. 이처럼 중대 문제를 협의하고 대책을 세우는 데 국무조정 역할을 맡은 총리는 뭘 했는가. 서로 발뺌하고 서로 책임을 미루는 이런 정부 정책을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는가. 판교 학원단지가 거론되자 언론이 즉각 비판했다.

또 하나의 강남을 만들 뿐이지 근본대책은 아니라고 했다. 그때 정부의 어느 누구도 학원단지가 에듀 파크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설령 에듀 파크인들 자립형 사립고.특목고를 집중 유치하는 데 어떻게 교육부와 긴밀한 협의 없이 가능한가.

위도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문제도 정부의 이런 안이한 자세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이미 안면도 핵폐기장이 주민 반대로 무산됐던 경험을 알고 있다면 정부의 접근 방식이 보다 치밀했어야 했다.

지역 군수가 총대를 메고 유치 입장에 나섰으니 위도 사태는 그렇게 악화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구체적 설득도 없이 현금보상 얘기를 먼저 흘려 주민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은 후 뒤늦게 현금은 안 된다고 했으니 일이 제대로 풀릴 리 없다.

또 정부의 고위 관료 누가 나서 이를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아 주민을 설득하려 했는지 우리의 기억에는 없다. 주민들로부터 린치를 당한 뒤 어찌 군수 한 사람한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모른 척하느냐는 부안 군수의 하소연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은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대통령이 모든 문제에 정답을 내기엔 사안이 복잡하고 중층적이며 전문성을 요구하는 난제들이다. 그래서 국무총리가 있다.

특히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해선 총리가 나서서 협의.조정하고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수렴해 그 정책의 타당성을 관계부처와 면밀히 검토해 정책화해야 한다. 다수를 위해 정당하고 국익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총리가 책임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총리는 대통령직을 보호하는 피뢰침 역할도 해야 한다. 민란 수준으로 민심이 흉흉한 위도 현장에 대통령이 못 간다면 총리라도 가서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그 요구가 왜 잘못됐는지 설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보였어야 했다. 허나 우리의 총리는 유감스럽게도 단 한번 위도 현장에 간 적이 없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대안으로 판교 신도시를 만들자면 각 부서의 대책을 종합하고 협의하며 교육부총리는 뭘 맡고 재경부.건교부는 뭘 해야 하는지 교통정리를 하고 정책대안을 내놓았어야 했다. 판교 학원단지 구상에서 총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문제가 된 지금 와서 총리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아직껏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행정의 달인은 어디에 있는가

새 정부 들어 6개월 남짓 된 시점에서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못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45.2%다. 잘한다는 평가는 8.5%에 그치고 있다. 그 책임의 절반은 총리에게 있지 않을까. 현 총리는 행정의 달인이라고 했다. 강남 집값이나 교육.위도 문제 모두 행정 책임자인 총리가 앞장서 대책을 세우고 추진하는 강한 면모를 보여야 한다.

개혁 실세가 따로 있고 중요 정보는 청와대로 직송되니 총리가 나설 일이 없다고 자포자기한다면 총리 스스로 그만두는 게 옳다. 국정 추진 과정이 실제로 총리를 물먹이는 현실이라면 대통령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 대통령직 훼손을 막기 위해서도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국정 전면에 나서도록 대통령이 독려해야 한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