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교민과 양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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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선조 선조는 사림(士林)의 강력한 지지를 업고 왕위에 오른 인물. 선대 명종에 대해 "소강(小康)을 이룰 만한 자질을 갖췄을 뿐"이라며 낮춰봤던 사림은 선조에 대해서는 "학문이 고명하고 정치도 정당하게 처리하여 역대 왕들보다 훨씬 낫다"며 추어올렸다. "왕족으로 숨어 살며 한평생을 마치려 하였으나 신민의 추대에 못 이겨 임금에 올랐다"고 술회한 선조는 권간(權奸).훈척(勳戚)들을 축출하고 신진 사류를 발탁.중용하며 사림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일단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개혁의 행보를 놓고 편 가름이 시작됐다. 그 첫 번째 힘겨루기가 향약(鄕約)시행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당시 민생은 왕조 수립 이래 거의 200년에 이르면서 생긴 적폐(積弊)와 선조 초 연이은 한발(旱魃)과 흉년으로 전국에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는 등 파탄지경이었다. "천륜(天倫)을 해치고 인기(人紀)를 더럽히는 놀라운 일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벌어진다"는 당시 사간원(司諫院)의 진단은 기실 민생의 참담함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태평성대'를 염원한 사림이 이를 좌시할 리 물론 없었다. 문제는 그 대책. 사림의 신진은 "교화를 닦고 밝혀 더러운 구습을 씻어내야 백성들이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구체적 정책으로 주자의 성리학에 기반한 향약의 전면 실시를 밀어붙였다. 선조 7년(1574년) 주도권을 쥔 신진 사류 중 하나였던 율곡 이이가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봉사는 상서(上書)나 봉장(奉狀)의 누설을 막기 위해 글을 주머니에 넣고 봉해 올리는 것. 율곡은 백성의 교화는 차선책에 지나지 않을 뿐, 최우선 과제는 파탄에 빠진 백성을 살릴 수 있는 근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향약 실시를 비판했다. 향약은 어디까지나 '교민(敎民)'의 차원이지 '양민(養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헌책(獻策)마저 결국은 사림 파벌 간 정권 쟁탈전의 도구로 화했을 뿐 이듬해 인순왕후의 상례(喪禮)를 둘러싼 복제(服制) 논쟁 같은 하릴없는 이념 논쟁에 골몰하면서 나라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임진왜란을 불과 20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400여 년을 격한 당시를 지금과 그대로 비교할 수는 물론 없다. 그런데도 율곡의 이른바 '양민론(養民論)'이 다시 생각나는 것은, 개혁의 이념 지향성과 그로 인한 폐해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대체 개혁이 무엇인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이래서는 민생의 피폐나 나라의 안위가 걱정된다고 고쳐 보자는 것 아닌가. 향약에 반대한 사람들도 개혁의 절박함에 대한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일을 풀어가는 정책의 선후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뿐. 하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이 편을 가르고, 이후엔 도대체 왜 편이 갈렸는지 무엇을 개혁하려 했는지조차 희미해진 채 서로의 생각만이 절대선인 듯 우겨대는 허망한 역사로 치달았던 것이다.

어느 시대인들 개혁과 혁신의 대상이 어찌 없을 것인가. 게다가 주자의 성리학이든 분배 우선의 경제철학이든 첨단 이념체계로 무장한 새 정치세력의 집권과 맞물릴 때 그 열기와 추동력이 더욱 강해짐은 당연할 터.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유리(遊離)된 채 자신의 이념체계만을 강요할 때, 나아가 현실과의 유리를 자신의 도덕적.이념적 우위에서 온 것으로 치부해 따라오지 않는 민심을 탓하며 원망할 때 탈이 나게 마련이다.

여당의 참패로 끝난 얼마 전 지방선거의 여진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여당의 새로운 지도부가 독선과 오만을 반성하며 경제 회생을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나섰지만 청와대는 기존 정책 고수 방침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아직도 선거 참패는 국민이 정책의 진정성을 몰라준 데서 나온, 따라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음을 되뇌고 있다. 이 국민이 그리 만만한가. 국민이 투표로 민심의 소재를 일러주고, 국민의 사세(事勢) 분별력이 권력의 머리끝에 올라 있는 21세기에도 가시지 않는 저 '교민'의 교만함이여.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