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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신재민의 폭로…“이건 나라냐”는 질문을 던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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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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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은 문재인 정권에 불리한 폭로를 했다는 이유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으로부터는 ‘망둥이’ 소리를 듣고, 내부고발자를 비롯해 약자의 인권을 대변한다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부터도 외면받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현역 시절엔 동기들 중에서도 잘 나가는 축에 드는 능력 있는 공무원이었던 모양이다. 조목조목 그의 주장을 반박하며 사실상 저격수로 나선 박성동 기재부 국고국장조차 “일 열심히 하고 붙임성 좋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낙관적으로 일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며 신 전 사무관의 업무역량과 인간성을 높게 평가할 정도니 말이다.

공용 PC에 보안장치 없이 대외비 방치한 기재부 #시장 뒤흔든 ‘정무적 판단’에 책임 안 진 김동연

인정받는 대한민국의 엘리트 공무원이 무슨 이유로 조직을 배신하고, 퇴사 후에도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바로 그 동료로부터 검찰 고발을 당하고, 급기야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됐는지를 놓고 세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는 공익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치켜세우고, 다른 누구는 그저 관심과 돈벌이에 눈이 먼 일탈일 뿐이라고 깎아내린다. 첫 유튜브 폭로 동영상부터 유서라며 올렸던 어제(3일) 글에 이르기까지 본인은 나름 상세하게 밝혔지만 제3자가 정확한 속내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재부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계기만큼은 확실하다. 바로 지난해 5월 문서 유출 사건이다. 청와대가 민간기업인 KT&G의 사장을 바꾸려 한다는 내용의 기재부 대외비 문건을 그가 언론에 유출한 후 동료들이 고통을 겪게 되고, 특히 그가 여러 차례 존경을 표한 박성동 국장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인 끝에 결국 두 달만인 7월에 사표를 던진 것이다.

신 전 사무관이 밝힌 유출 경위를 보면 주장이 엇갈리는 문서의 내용은 차치하고 ‘이게 나라냐’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웬만한 기업은 물론이요 요즘 초등생보다 못한 문서 관리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신 전 사무관은 지난해 2월 세종시 기재부 사무실이 아니라 차관의 비공식 집무실인 서울지방조달청 공동 사무실에 있는 공용 컴퓨터에서 관련 문건을 처음 봤다. 외부에 나가면 안 되는 문서였지만 비밀번호를 걸어놓기는커녕 컴퓨터 전원을 켜면 바로 보이는 바탕화면에 버젓이 ‘KT&G 동향보고(대외주의 차관보고)’라는 이름이 붙은 채 아무런 보안장치 없이 저장돼 있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이 파일을 보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유출한 것도 아니다. 처음엔 보기만 하고 다시 닫았다. 그런데 한 달 뒤 다시 보고차 서울에 와서 이 컴퓨터를 켰을 때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결국 고민 끝에 평소 알던 기자에게 전달했다. 언론 보도 후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해당 과 조사를 하고 국무총리실 공직기강실은 비공개자료 관리실태를 별도로 감찰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결국 유출자는 찾지 못했다. 요즘은 비단 기밀을 취급하는 곳이 아니라 웬만한 기업들도 파일을 복사하거나 프린트하면 쉽게 추적이 가능한데 대한민국 핵심 경제정책을 다루는 기재부는 그런 간단한 장치조차 마련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중 간 스파이 전쟁이나 북한의 빈번한 해킹 시도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정부 부처 문서의 보안 유지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서를 유출한 죄만큼이나 외부에 나가면 안 되는 자료를 아무렇게나 방치한 죄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국가채무 규모 조작 시도와 관련한 일련의 상황도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자아낸다. 비단 문재인 정부의 ‘어공(어쩌다 공무원)’뿐 아니라 ‘늘공(직업 공무원)’조차 ‘정무적 판단’이라는 이유로 국가와 국민에 피해를 끼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걸 알게 돼서다.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2017년 11월 14일 발생한 국채 조기상환(바이백) 취소 소동 얘기다. 신 전 사무관을 비롯해 당시 차관보에 이르기까지 기재부 담당자는 모두 반대하는데도 부총리는 적자성 국채 발행을 고집했다. 여기서 ‘정무적 판단’이 등장한다. 김 전 부총리는 “1급까지 올라가 놓고도 뭐가 중요한지 정무적 판단을 못 하느냐”며 차관보를 질타했다. 결국 실무진들은 바로 다음 날 예정이었던 1조원 규모의 국채 조기상환 입찰을 하루 전 전격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국채시장 개설 이후 처음 벌어진 일에 시장은 큰 혼란을 겪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후 김 전 부총리가 보였다는 태도다. 신 전 사무관에 따르면 김 전 부총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분명히 조기상환 취소하라고 한 적 없다. 내가 시장 흔드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시장에 공표한 거 알았으면 난 절대 못 하게 했을 거다. 내가 그날 좀 세게 말해서 알아서들 조정했던 거 같은데 앞으로 그럴 필요 없다.”

김동연 전 부총리는 지난해 12월 퇴임사에서 ‘용기’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는 청와대 사람들의 공공연한 패싱(따돌림) 속에 제 목소리를 못 내다가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할 말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국가 시스템에 끼치는 피해는 아랑곳없이 정무적 판단을 운운하며 책임을 피해갈 궁리만 해온 것이었나. 진위가 궁금해 전화했지만 끝내 답을 못 들었다.

이러니 ‘이게 나라냐’며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요즘 ‘이건 나라냐’고 다시 묻는 것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