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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변신 '흥행 和答' 주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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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같은 모습, 긴 생머리에 입가를 살짝 올린 표정이 이제는 지겹습니다."

말 안 듣는 남친에게 강펀치를 먹이는 '엽기녀'로 스타덤에 오른 전지현의 팬클럽 사이트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에는 "그 모습이 좋아서 팬이 됐지만 이제는 뭔가 다른 걸 보여달라"는 주문이 집약돼 있다.

'엽기적인 그녀'의 차기작을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전지현은 올 여름 미스터리 심령물 '4인용 식탁'에서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틀어올리고 마치 자폐증에라도 걸린 듯한 말 수 적은 여인으로 변신, 호평을 받았다.

고만고만한 이미지의 반복은 스타 자신에게도 지겨울지 모른다. 스타가 되게 해준 바로 그 이미지가 때로는 스스로를 얽어매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스타에게 변신은 항상 숙제다. 최근 충무로에 불고 있는 배우들의 활발한 변신 움직임은 고인 물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누가 누가 변신했나=이 분야 최고의 뉴스 메이커는 사극 영화 '조선시대 남녀상열지사-스캔들'(10월 2일 개봉)의 바람둥이 선비 조원 역으로 충무로에 데뷔하는 배용준이다. 우선 외모상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부드러운 느낌의 바람머리와 트레이드 마크인 안경 대신 상투를 틀고 턱수염을 붙였다.

역할도 파격적이다. '첫사랑''겨울연가' 등 TV 드라마에서 늘 지순한 사랑의 주인공이던 그가 사촌 누이 조씨 부인(이미숙)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27년간 수절한 숙부인(전도연)을 유혹하는 카사노바가 됐다.

내기를 걸어오는 조씨부인에게 "그 가엾은 청상에게 음양의 이치를 가르쳐줘야 되지 않겠소?"라고 한다거나 매형의 소실로 들어오는 소옥(이소연)을 두고 "열여섯살이면 한창 호기심이 많아 상냥한 말 한 마디면 자리 펴고 누울 나이 아니오?"라는 식의 대사가 능청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가 하면 이미지로는 '백마 탄 왕자'로, 사생활에서는 '반듯한 연예인'으로 알려진 차인표는 목포의 조폭 두목이 된다. 올해 말 개봉하는 코미디 영화 '목포는 항구다'를 위해 그는 한번도 바꾼 적이 없던 단정한 직모 머리를 포기하고 길고 구불구불한 '아줌마 파마'를 했다.

후보에는 염색머리, 조폭들이 하는 이른바 '깍두기 머리', 7대3 가르마 등이 올랐지만 결국 본인이 제안한 파마 머리로 낙착을 봤다. 맹연습한 호남 사투리도 곁들인다.

'의리의 터프가이' 김민종도 12월 개봉하는 코믹 사극 '낭만자객'으로 변신 대열에 합류했다. 하는 일마다 실수 연발인 '낭만자객단'의 얼치기 2인자 요이 역이다. 다소 심각하고 무게 잡던 그의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역할이다.

'낭만자객'을 홍보하는 정은선 실장은 "연출자인 윤제균 감독이 김민종이 카메라 앞에 서면 '민종아, 눈에 힘 빼자!'라고 외칠 정도로 이미지 바꾸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n세대 CF 스타 이나영도 11월 개봉하는 김성수 감독의 코미디 '영어완전정복'에서 신비의 베일을 벗어던지고 검은 뿔테 안경을 걸쳤다. 여고생 갈래머리에 앞머리도 일자로 잘랐다. 일부 장면에서는 치아교정기까지 낀다. 짝사랑하는 남자(장혁)를 위해 영어 배우기에 목숨 거는 엉뚱한 동사무소 여직원 역할을 위해서다.

◇변하고 싶다, 변해야 산다=스타에게 변신은 도박이나 다름없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스타란 고정화된 이미지를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이미지를 바꾼다는 건 자신의 상품 가치를 걸고 하는 모험"이라고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 출연이 CF 섭외로 연결되는 현실에서 섣부른 변신은 안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변화를 원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한번 굳어진 이미지를 우려먹는 것에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자신도 지겨운데 남들은 더하지 않겠느냐는 위기감이 작용하는 것이다. 프로 배우로서 작품에 대한 욕심도 한몫 한다. 감춰진 야누스적인 면을 끌어내줄 작품만 있다면 망가지는 것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각오다.

세련된 도시 멋쟁이나 고독한 반항아 이미지의 정우성은 경상도 사투리 연습까지 해가며 '똥개'에서 백수 건달로 탈바꿈했다. 비록 흥행은 손익분기점을 넘는 선에 그쳤지만, 트레이닝복 차림에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를 담그는 그의 망가진 모습은 관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배용준도 비슷한 이유로 '스캔들'을 택했다. "'겨울 연가' 이후 영화 제의가 수없이 들어왔지만 대부분 그때까지 내가 보여준 모습을 사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변하고 싶었다."

◇결국은 흥행이 변수?=그러나 스타의 변신은 대개 흥행으로 유.무죄가 갈리기 때문에 언제든지 제약받을 수 있다. '가문의 영광' 히트 후 멜로물 '나비'에서 비련의 여인으로 변신을 꾀했던 김정은이 그런 예다. 김정은은 '나비'로 쓴 잔을 마시고 전공인 코미디물 '불어라 봄바람'으로 돌아갔다.

전찬일씨는 "흔히 흥행이 안 되면 배우의 변신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저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성공한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을 높이 사줄 때 스크린에는 좀더 다채로운 빛깔의 연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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