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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월드컵은 축구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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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54년 베른. 1974년 뮌헨. 1990년 로마. 2006년 이곳(베를린)'.

올해도 독일팀이 우승할 것이라는 강력한 기대와 자부심이 담겨 있다. 32년 만에 홈그라운드서 열리는 월드컵, 특히 통일 후 첫 개최되는 대회라 독일인들의 감회가 새롭다.

독일인들은 이번 월드컵에서 또 한차례 '베른의 기적'을 기대하고 있다. 5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월드컵에선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독일은 강력한 우승후보 헝가리에 3-8로 무너졌다. 조 2위로 기사회생한 독일은 터키(7-2), 유고슬라비아(2-0), 오스트리아(6-1)를 잇따라 격파한 뒤 결승에서 다시 헝가리와 맞붙었다. 초반부터 밀리던 독일팀은 경기 시작 8분 만에 2골을 먹었다. 누구나 승부가 기울었다고 생각했지만 2분 만에 만회골이 터졌다. 독일은 전반 18분 동점골에 이어 후반 경기 종료 6분을 남겨놓고 극적인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재건의 망치를 두드리던 독일인들은 환호했다. 낙담과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날려주는 낭보였다. 이 사건은 독일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줬고, 요즘도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다. 2003년에는 '베른의 기적'이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극장가를 붐비게 했다.

독일은 월드컵에서 우승할 때마다 국운이 크게 상승하는 기회를 잡았다.

^54년 스위스 월드컵 때는 전후 폐허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마술과 같은 베른에서의 역전승처럼 10년간 경제성장률은 무려 107%였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독일인 특유의 강인함이 바탕이 된 결과였다. ^74년 뮌헨 월드컵 때는 '오일 파동'이라는 어려운 경제 여건을 뚫고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어 냈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제패했던 90년은 40여 년의 분단역사를 마무리하고 동.서독 통일을 이루는 역사적 쾌거를 이끌어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올 신년사에서 "16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처럼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우리나라가 큰 기회를 잡고 있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그는 "10년 후 다시 독일이 유럽의 1등 국가가 되도록 목표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독일에서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침체된 경제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월드컵을 통해 국내총생산에서 800억 유로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독일인에게 자신감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통일 부작용, 경제.사회 개혁으로 움츠러든 국민에게 월드컵을 통해 전해주고픈 독일 정부의 메시지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khyou@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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