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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우승을 만든 '효과적 올인'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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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삭스가 다시 우승하려면 86년 후가 될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가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전전승으로 꺾고 챔피언에 오르자 뉴욕 양키스 팬들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앞서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레드삭스에게 3연패로 완패했다.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도 승리하자 카디널스 팬보다 양키스 팬들이 더 부글거렸다.

돔브로스키 사장 '탱킹'과 '올인' 오가 #돈을 잘 쓰는 방식으로 최강팀 만들어 #코라 감독은 온화하고 영리하게 스타 관리

1912·15·16·18년 월드시리즈 챔피언 레드삭스는 우승의 주역 베이브 루스를 라이벌팀 양키스에 트레이드 한 뒤 저주에 시달린 듯 월드시리즈 우승에 번번이 실패했다. 루스의 별명을 딴 '밤비노의 저주'는 86년 후에야 깨졌다. 이 꼴조차 보기 싫었던 양키스 팬들은 레드삭스가 다시 우승하려면 또 86년이 걸릴 거라고 저주를 내렸다. 2090년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드삭스는 2007·13년에 이어 2018년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1세기 들어 가장 많이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른 팀이 레드삭스다. 반면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팀(27회) 양키스는 2009년을 끝으로 정상에 서지 못하고 있다.

보스턴 선수들이 10월 29일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보스턴 선수들이 10월 29일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레드삭스의 우승은 '밤비노의 저주'를 깰 때와 다르다. 선수들이 대부분 바뀌었고, 구단 전략도 달라졌다. 변화무쌍한 메이저리그 트렌드를 선도한 덕분에 레드삭스는 21세기 최강팀으로 우뚝 섰다.

레드삭스의 프런트 오피스(구단 운영진)의 핵심은 데이브 돔브로스키(62) 사장이다. 풋볼 선수 출신으로 코넬 대학교에 입학했다가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꿔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로 편입한 그는 1978년부터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마이너리그 팜 관리자로 입사했다. 능력을 인정 받아 단장보좌역까지 올랐다.

만 31세였던 1987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단장에 부임한 돔브로스키는 1991년 플로리다 말린스 단장으로 옮겨 거액의 계약을 연달아 성공해냈다. 1997년 말린스는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이듬해 비싼 선수들을 대거 팔아치웠다. 지속적으로 거금을 쓸 순 없으니 몇 년 하위권에서 버티며 유망주를 모으는 전략(탱킹)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돔브로스키의 특장점은 명확했다. 돈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것이다.

데이브 봄브로스키 레드삭스 사장이 우승 축하행사를 보며 흐뭇해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데이브 봄브로스키 레드삭스 사장이 우승 축하행사를 보며 흐뭇해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3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단장이 된 돔브로스키는 또 다시 탱킹 전략을 썼다. 2003년 43승119패(승률 0.265)에 그쳤던 타이거즈는 2010년 이후 상위권에 오른다. 월드시리즈 우승은 못 했지만 돔브로스키의 컬러는 더 명확해졌다. 2016년 레드삭스 사장에 오른 돔브로스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2013년 월드시리즈 우승 후 레드삭스는 2014·15년 리그 지구 꼴찌에 머물렀다. 돔브로스키는 레드삭스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공격성을 보였다. 특급 마무리 크레이그 킴브럴을 영입했고, 크리스 세일과 데이비드 프라이스로 선발 원투펀치를 구성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FA 타자 J D 마르티네스를 5년 1억 1000만 달러를 사들였다. 타선은 이미 충분히 강했지만 은퇴한 데이비드 오티스를 대신할 중심타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마르티네스를 영입한 것이다. 이런 투자들이 이어지면서 2018년 보스턴 팀 연봉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2억2300만달러·2600억원)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레드삭스가 '돈으로 만든 팀'은 아니다. 지난 4~5년 동안 레드삭스 외야진은 리그 최하에서 최고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킬러 B' 타선을 이룬 무키 베츠(2011년 5라운드)-젠더 보가츠(2010년 자유계약)-재키 브래들리 주니어(2011년 1라운드)는 레드삭스 팜 시스템에서 성장됐다. 육성과 투자의 균형을 찾다가 베팅할 순간이 오면 과감하게 돈을 더 푸는 게 돔브로스키의 방식이다.

보스턴은 올해 정규시즌에서 30개 구단 중 최고 승률(0.667·108승54패)을 기록했다. 시즌 내내 페이스가 좋았지만 트레이드 마감시한(7월)을 앞두고 돔브로스키는 좌투수 킬러 스티브 피어스와 오른손 선발 네이선 이볼디를 영입했다. 2108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올인'하겠다는 메시지였다. FA 영입, 대형 트레이드 과정에서 유망주를 내주는 손실이 있었지만 돔브로스키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장 시절부터 유망주를 보는 눈이 탁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돔브로스키가 돈을 들여 영입한 베테랑들과 팜에서 성장한 유망주들은 두꺼운 선수층을 형성했다. 정규시즌부터 월드시리즈까지 조금씩 기복이 있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특히 이볼디는 월드시리즈에서 에이스 못잖은 활약을 펼쳐 돔브로스키의 성과를 증명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은 "돔브로스키는 이전부터 돈을 많이 쓰는 팀에서 일했다. 돈을 많이 쓸 뿐 아니라 잘 쓴다. 팀에 필요한 선수를, 필요할 때 데려와 잘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경영인"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에서는 '머니볼'이 유행했다. 전통적인 기록보다 다양한 통계적 접근(세이버 메트릭스)을 중시하며 효율적인 선수를 찾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아이비 리그 출신의 젊고 명석한 단장들이 메이저리그의 주류로 올라선 시점이다.

그러나 많은 팀들이 세이버 메트릭스를 활용하자 차별성이 흐려졌다. 여러 구단이 비슷한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데이터에 기반한 선수 구성·활용뿐 아니라 프런트 오피스와 코칭스태프의 리더십이 어우러져야 한다. 무엇보다 숫자에 나타나지 않는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돔브로스키는 30년 이상 메이저리그 단장과 사장을 지내며 수없이 바뀐 리그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탱킹'과 '올인' 전략을 수시로 드나드는 독특한 색깔도 가지고 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돔브로스키는 그가 구성한 레드삭스 선수단을 이끌 사령탑으로 영리하고 온화한 알렉스 코라(43) 감독을 선임했다.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는 알렉스 코라 감독(오른쪽). [연합뉴스]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는 알렉스 코라 감독(오른쪽). [연합뉴스]

푸에르토리코 출신 내야수였던 그는 평범한 성적으로 은퇴했다. 레드삭스의 많은 특급 스타들이 월드시리즈 우승 인터뷰에서 코라 감독을 추앙했다. 세일은 "코라는 우리 팀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정말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했다. 이볼디는 "그의 모든 전략이 적중했다. 그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겨주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코라는 매우 안정적으로 정규시즌을 운영했다. 눈앞의 1승을 위해 절대 무리하지 않았고, 선수들의 부상 관리에 집중했다. 선수들과 직접 소통했고, 선수의 인생에 대해 얘기하며 신뢰와 존중을 쌓아갔다.

포스트시즌 들어 코라는 전혀 다른 리더가 됐다. 레드삭스의 선발진이 상대적으로 열세였기에(프라이스는 클레이턴 커쇼 이상으로 포스트시즌 징크스가 있었다) 시리즈를 최대한 빨리 끝내는 전략을 짰다. 킴브럴을 제외한 불펜이 약했기 때문에 보직을 파괴해가며 마운드 운영을 했다.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3승1패),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4승1패)를 이 방식으로 이겼다.

코라는 비슷한 선수 구성의 다저스(총 연봉 4위·1억8000만 달러)와의 월드시리즈도 같은 패턴으로 풀어갔다. 커쇼, 류현진, 워커 뷸러, 리치 힐 등 안정적인 선발진을 갖고 있는 다저스는 시리즈를 6~7차전까지 끌고 가야 승산이 있었다. 1·2차전을 이긴 레드삭스는 3차전에서 연장 18회 승부 끝에 졌다. 특히 선발요원 이볼디는 13회부터 6이닝이나 던졌다.

최대 위기에서 코라 감독은 의연했다. 그는 7시간20분 혈투에 지친 선수들 하나하나에게 "오늘 정말 고마웠다. 여러분과 함께해 정말 자랑스럽다"며 격려했다. 레드삭스 내야수 잰더 보가츠는 “이 미팅이 끝났을 때 우리는 경기에서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3차전을 내주긴 했지만 4차전 이후 레드삭스 선수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너도나도 던질 수 있다고 손을 들었다. 연장전에서 여러 투수를 쓰지 않고 이볼디에게만 맡긴 전략이 성공했다. 4차전은 타격으로 이겼고, 5차전은 선발 프라이스와 세일의 깜짝 마무리로 승리했다. 다저스보다 레드삭스의 팀워크가 좋았고, 벤치워크가 더 뛰어났다.

송재우 의원은 "다저스 사장인 앤드루 프리드먼은 탬파베이 레이스 단장 시절 효율적인 경영으로 뛰어난 성과를 냈다. 스몰마켓에서 잘 통하는 전략을 (빅마켓인) 다저스에서도 썼다. 트레이드 마감시한 때 데려온 (지난해) 다르빗슈 유, (올해) 매니 마차도 영입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며 "반면 돔브로스키는 레드삭스에 필요한 선수를 정말 잘 데려왔다. 코라는 서말 구슬을 잘 꿰어 보배로 만든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월드시리즈 축하 행사에서 보스턴 팬들이 '다저스가 또 졌다'고 쓴 플래카드를 들었다. [연합뉴스]

월드시리즈 축하 행사에서 보스턴 팬들이 '다저스가 또 졌다'고 쓴 플래카드를 들었다. [연합뉴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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