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보조금 누수, 보증 세워 막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눈먼 돈.’

지원할 때 보증보험 들게 하면 #연간 67조 중 16조~17조5000억 #채권 확보 통해 환수하기 쉬워져 #유치원 지원금 등 유용 막으려면 #보조금으로 명목부터 바꿔야

연간 67조원에 달하는 국고 보조금에 따라붙는, 유쾌하지 않은 꼬리표다. 최근 불거진 사립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회계 비리 사건은 이 ‘눈먼 돈’이 얼마나 줄줄 새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이들을 위해 쓰여야 할 돈이 유치원장의 명품 가방을 사거나 유흥업소 등에서 유용된 것으로 알려지며 학부모와 일반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이와 관련해 보험업계 등에서 “보조금 누수를 막기 위해 보증보험이나 금융기관의 지급보증 의무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고보조금관리시스템인 ‘e 나라 도움’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고보조 사업은 1569건으로 66조9000억원 규모다. 올해 국가 예산(428조7000억원)의 15.6%를 차지한다.

전체 국고보조금 중 보조금 환수를 위한 채권 확보가 필요한 경우는 16조~17조5000억원 규모일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토지와 건물 매입 등에 필요한 자본 보조금과 고령연금이나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지급되는 복지성 보조금 등을 제외한 수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 중 채권 확보를 위한 보증보험 가입이나 금융기관의 지급 보증이 이뤄진 보조금은 1조5000억~2조원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관련 업계의 설명이다. 보조금의 지급 명목이나 목적에 맞지 않게 돈이 쓰이더라도 다시 찾아올 방법이 사실상 없거나 되찾기가 몹시 어렵다는 뜻이다.

국가권익위원회가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실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2013년 10월~올해 7월까지 최근 5년간 정부보조금과 지원금 부정수급과 관련한 환수결정액은 696억원(1757건)이었다. 하지만 이 수치는 결정액일 뿐이다.

보조금의 실제 환수 절차는 해당 부처나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담당한다. 보조금 환수결정액 중 실제로 얼마를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지 의원은 “채권 확보 조치는 차치하고 보조금 환수 여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주무부처인 권익위가 중심이 돼 예산 누수를 예방하고 감시할 통합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스템 구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당장의 누수를 막기 위해서라도 보조금 지원시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해 보조금 환수 시 채권 확보를 위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례도 있다. 고용노동부의 위탁을 받아 근로복지공단이 지원하는 직장어린이집 지원금을 받으려면 보증보험 또는 금융기관 보증서를 반드시 받아와야 한다. 심재붕 근로복지공단 일가정양립지원부 차장은 “‘직장어린이집 설치·운영 규정’에 따르면 어린이집 설치·운영 지원금을 받으려는 회사(보험자)는 공단을 피보험자로 해 지원금의 110%를 보험금으로 하는 보증보험에 가입해야만 지원금 신청서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의 산업공단에 기업을 유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방투자촉진보조금’의 경우에도 해당 지자체의 관련 조례 등에서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유치원과 어린이집 지원금과 보조금에 대한 보증보험 가입 의무화가 이뤄지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우선 유아교육법과 영유아보육법상 지원금을 보조금으로 바꾸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유아교육법 개정안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표 발의로 현재 계류된 상태지만 국회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김남희 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은 “누리과정을 통한 지원금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직접 주는 보조금이 아니라 학부모에게 주는 지원금이기 때문에 목적에 맞지 않게 유용하더라도 환수할 수 없다”며 “학부모에게 주는 지원금을 보조금으로 바꾸는 것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조금 교부와 관련해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 채권 확보를 통한 환수 절차가 보다 용이할 수 있다”며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차원에서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