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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문명기행

칼을 구부려 매장한 뜻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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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중앙SUNDAY 부국장

이훈범 중앙SUNDAY 부국장

“구산동 고분군은 어디로 가나요?”

사진 명소 아래 묻힌 가야의 비밀 #청동 솥과 도질 토기, 순장 풍습 #가락국 지배층은 북방계 부여족? #끊긴 역사 잇는 것이 우리의 숙제

“?”

“옛날 무덤들이 있는 곳이요.”

“저 위에 큰 무덤이 하나 있기는 한데….”

“무덤 여러 기가 모여있는 곳이거든요?”

“그럼, 잘 모르겠네.”

수로왕비릉(경남 김해시)을 둘러보고 인근에 있다는 구산동 고분군까지 가볼 참이었다. 분명 100m 앞이라는 이정표도 있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너무 가까워 안내할 수 없다”고 외치는데, 위치를 아는 주민을 만나기 힘들었다. 차를 세워두고 주택가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결국 찾아낸 곳은 아까 노인이 말하던 ‘저 위의 큰 무덤’이 맞았다. 군(群)이란 말이 무색하게 봉분이 온전한 것 하나와 봉분이 반쯤 남는 또 하나, 달랑 두 개의 고분이 남아있었다. 알고 보니 400m쯤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무덤이 있는데 이 셋을 합쳐 구산동 고분군이라고 한다는 거였다. 그래도 주변을 나름 주차장까지 갖춘 소공원으로 조성해놓았는데, 찾는 사람이 없는지 주차공간은 인근 주민들의 나물 말리기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긴 오늘 그 자리에서 사는 사람들이 1500년 전에 죽은 자들에게 관심 가질 일이 뭐 있겠나. 그보다는 올겨울 먹을 나물 말리기가 더 급한 것이다.

구산동 고분은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굴식돌방무덤’이어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는 곳이다. 굴식돌방무덤이란 관을 넣는 방을 만들고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흙을 덮는 것이다. 고교 때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라고, 뜻도 모르고 외우던 것인데 요즘은 우리말로 풀어 가르치고 있다. 잘한 일이다. 이런 무덤 양식은 원래 고구려에서 먼저였다. 5세기 이후에야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도 만들기 시작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유행했다. 구산동 고분을 6세기 말 만들어진 것으로 금관가야 멸망 후 김해에 남아있던 왕족 후예들의 무덤으로 추측하는 이유다.

김해의 수로왕비릉. 수로왕릉과 직선거리로 1?쯤 떨어진,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왕비 세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이훈범 기자]

김해의 수로왕비릉. 수로왕릉과 직선거리로 1?쯤 떨어진,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왕비 세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이훈범 기자]

수로왕릉 근처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은 훨씬 더 그럴듯하고 야외전시관으로 잘 꾸며놓았다. 봉분을 쌓은 형태가 아니라서 입구의 철기무사 동상이 아니라면 그냥 공원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곳은 일몰 사진 명소로도 손꼽히는 곳이다. 해질녘 언덕 위에 나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를 역광으로 찍으면 실루엣이 아름다운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사실은 공백으로 남아있던 가야사를 밝혀줄 단서들이 묻혔던 대단히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이곳에서는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돼 고분박물관까지 따로 만들었을 정도다. ‘왕가의 언덕’이라고 부를 만큼 3~5세기 가락국 지배자 집단의 무덤들인 까닭이다. 현재 2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됐는데, ‘널무덤’ ‘덧널무덤’ ‘돌방무덤’ 형태로 변화한 가락국 무덤의 전개과정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양식은 덧널무덤이다. 예전에 목곽묘(木槨墓)라고 외운 것이다. 널무덤, 즉 목관묘(木棺墓)가 커진 형태로, 땅을 파고 나무관을 묻던 형태에서 나무판을 댄 방을 만들고 그 안에 나무관을 안치하는 것이다. 공간이 넓어진 만큼 부장품이 많다.

그런데 이 부장품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우선 ‘오르도스형 동복(銅鍑)’이다. 동복은 청동 솥을 말하는데, 주로 고기를 삶는 데 사용되는 것으로 흉노 같은 북방계 유목민족들의 전형적인 유물이다. 중국 것과는 달리 다리가 없고 말에 매달고 다닐 수 있도록 반원형의 귀가 양쪽에 달렸다. 큰 칼을 일부러 구부려 부장한 것과 ‘순장(殉葬)’ 역시 이전까지는 한반도에서 확인되지 않던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도질(陶質) 토기의 출현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 만든 단단한 토기다. 이전의 토기들은 700~800도에서 구운 무른 와질(瓦質) 토기들이었다. 도질 토기 역시 중국 북방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로 북방문화가 한반도 최남단인 김해까지 유입된 것일까. 교역이나 문화 교류로 인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다면 김해보다 북쪽 지역에서 대성동 고분보다 이른 시기의 북방문화 흔적이 발견됐어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대성동 고분에서 이전 무덤을 파괴하고 새 무덤을 만든 흔적까지 발견되고 있는 점과 함께 북방계 주민들의 대규모 이주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부여족의 남하다. 중국의 『진서(晉書)』 동이열전 부여국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제 때는 자주 조공을 바쳤는데 태강 6년(285)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옥저로 달아났던 부여 왕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동해안을 따라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존의 지배집단을 교체하고 가락국을 일으킨 주체라는 가설이다. 김해 대성동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만 나무 덧널을 불에 그슬리는 북방민족들의 습속이 발견되는 점도 이 가설에 힘을 싣는 대목이다.

하지만 부여족 남하설은 여전히 가설일 뿐이다. 순장은 가락국의 건국자인 수로왕 때도 행해졌다는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이 199년에 죽었으니 앞뒤가 맞지 않기도 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이런 얘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수로왕릉을 파헤쳤다. 시신 옆에 두 여자의 시신이 있었다. 얼굴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나이는 20세 정도였다. 무덤에서 꺼내 바깥에 두니 곧바로 소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수로왕이 157년을 재위했다는 게 『삼국유사』의 기록이니만큼 ‘신화적’인 내용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수로왕의 신화적 탄생지인 ‘구지봉’은 오히려 수로왕비릉에 가까이 있다. 거북이 웅크린 모습이라 해서 구지봉이라 했다는데 일제 때 머리 부분을 잘라내 길을 냈다. 맥을 끊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길 위를 흙으로 덮고 일부러 터널을 만들어 거북의 기를 조금이나마 살려내고 있다. 끊어진 가야의 역사를 찾아내 잇는 것도 오늘날 남겨진 숙제다.

이훈범 중앙SUNDAY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