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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대통령 연쇄회담에서 나타나 미,중,러 대북제재 완화 이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싱가포르와 파푸아뉴기니를 잇는 5박6일 간의 순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중국·러시아의 정상 또는 정상급 인사와 북핵 문제를 놓고 연쇄 회담을 벌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사국들의 미묘한 입장차가 노출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 대통령은 1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시작으로 15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17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을 만났다. 지난달 유럽 순방과 달리 문 대통령은 이번엔 직접적으로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제기하진 않았다. 제재 전선을 두고 형성된 미국 대 중ㆍ러의 대립구도를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현지시간) 싱가포르 선텍(Suntec) 컨벤션 센터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페이스북)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현지시간) 싱가포르 선텍(Suntec) 컨벤션 센터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페이스북)

펜스 부통령은 문 대통령을 만나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 NBC 방송 인터뷰에선 “2차 정상회담에선 의심스러운 모든 무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개발시설의 위치를 파악하고, 사찰단을 보내고,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한 계획을 도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이행될 때까지 북한에 대한 압박을 유지함으로써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추가적인 비핵화 조치없이 현 시점에서 대북 제재 완화는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세안(ASEAN) 관련 회의 참석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14일(현지시간) 샹그릴라 호텔 아잘리아 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이번이 네 번째로, 지난 6월 이후 5개월 만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아세안(ASEAN) 관련 회의 참석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14일(현지시간) 샹그릴라 호텔 아잘리아 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이번이 네 번째로, 지난 6월 이후 5개월 만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반면 러시아·중국의 기류는 달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만났을 때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긴 어렵지만, 포괄적으로 제재 완화에 대해 말씀을 나눴다”고 밝혔다. 한ㆍ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한반도 문제가 대화와 협상이라는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우리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다는 게 증명됐다”며 중국의 ‘지분’을 다시 강조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 완화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중요한 역할을 높게 평가한다”고 화답했다. 중국은 이미 “대북제재를 적절한 시점에 완화해야 한다”(11.2 마자오쉬 유엔 대사)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상태다.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의 주파수가 맞는 지점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후 포트모르즈비 시내 스탠리 호텔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후 포트모르즈비 시내 스탠리 호텔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다만 이번 회담에서 한ㆍ중 정상이 대북제재 완화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것은 미ㆍ중 간 무역전쟁 해결이 시급한 중국이 신중한 접근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 주석이 방북 계획을 공식화하면서도 시점은 연내가 아닌 내년이라고 못박은 것도 미국을 의식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ㆍ중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북한의 태도가 이상해진다고 의심하는 상황에서 굳이 북ㆍ미 정상회담 전에 방북해 미국을 자극하고 상황을 껄끄럽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중국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17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 가운데)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사진 뒷모습)이 파푸아뉴기니 포트 모레스비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공식 기념 촬영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AP=연합]

17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 가운데)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사진 뒷모습)이 파푸아뉴기니 포트 모레스비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공식 기념 촬영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AP=연합]

이런 입장 차이는 아세안 관련 다양한 정상회의들의 결과물인 의장성명에서도 드러났다. 아세안+3(한ㆍ중ㆍ일) 정상회의 의장성명에서는 “우리는 완전한 비핵화(CD) 달성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주목했다”고 했는데,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의장성명에는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달성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약속했다”고 돼 있다. 아세안+3 회원국에 미국 등 5개국이 추가된 협의체가 EAS다. 이와 관련,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EAS 의장성명 사전 조율 과정에서 한국은 북한을 배려하기 위해 CVID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CVID 문구는 미국 측 요구로 포함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세안+3 의장성명에는 ‘판문점 선언, 평양공동선언,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이행 촉진을 위한 노력’이라는 문구도 들어갔으나, EAS 의장성명에는 빠진 것도 눈에 띈다.
유지혜·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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