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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윤 의사 의거 흔적 없는 홍구 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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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우리 대학생 연수단이 중국과 헝가리를 방문, 12일 동안 체제가 다른 사회의 대학과 주민 생활 이모저모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대학생의 눈에 비친 사회주의 세계의 개방화·물결은 어느 정도인지, 중국 연수단의 일원인 최종명 군 (23·연세대 행정학과 3년)의 기행문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야릇한 긴장감과 설렘 속에 중국 대륙에 첫발을 디딘지 3일째.
우리 대학생 중국 연수단 일행은 윤봉길 의사의 항일 투쟁의 역사가 서려 있는 상해 시내 홍코우 (홍구) 공원을 찾았다.
60여년 전 조국 광복을 위해 침략의 주범들을 응징키 위해 일제에 폭탄을 던진 윤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공원은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숙연한 기분으로 먼저 공원 입구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 인민복 차림의 40대 후반 관리인에게 윤 의사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윤 의사의 이름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관리인은 『윤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정확한 장소는 모르겠다』며 머리를 내저었다.
실망을 느낀 우리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다함께 고개 숙여 윤 의사의 뜻을 기리는 묵념을 올림으로써 아쉬움과 섭섭함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침략기에 대한 남아의 기백을 크게 떨쳐 중국인들을 감동시켰고, 이후 독립 운동에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게 한 윤 의사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에 섭섭함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공원에는 산책을 나온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어 서울의 여느 휴일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벤치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밀어를 나누는 청춘 남녀들의 자연스런 모습과 청바지차림 등에서 중국 대륙에 불어닥친 개방의 물결을 실감하기도 했다.
공원을 거의 한바퀴쯤 돌았을 때 우리 일행은 양지바른 목에 앉은 자세의 동상을 하나 발견하고는 혹시 윤 의사의 동상이 아닐까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으나 그것은 유명한 근대 중국의 『아Q정전』의 작가 노신의 동상이어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우리 일행은 중국과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중국 땅에서 선열들의 유적을 더 자세히 찾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상해를 떠난 지 3일만에 우리 일행이 도착한곳은 북경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중국의 대학 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북경 도착 다음날, 우리 일행은 북경대학·청화대학·북경사범대학과 함께 4대 명문중 하나인 북경 인민 대학을 방문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도서관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중국의 모든 학교에서는 점심시간 직후 1시간 가량의 「오침」 시간이 있어 학생들은 기숙사로가 낮잠을 자거나 운동장에서 농구나 배구 등 운동을 즐기는데 농구가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라는 것이다.
이어 북경 대학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학생회 간부 및 조선족 학생 10여명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북경 대학은 1898년에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학부생 1만3천명, 석·박사 과정 7천명 등 모두 2만여명의 학생들이 학비와 기숙사비를 부당치 않고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국의 대학생들도 한국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부와 과외 활동 및 자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학생 활동은 2년마다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각각의 자치기구, 서클 등의 단위로 이루어지며 전국적인 연계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도 이성 교제와 아르바이트가 중요 관심사로, 수학과 2학년생인 석정수 군은 『북경대생의 이성 교제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며 주로 미팅, 소개팅 및 「러샹」이라 불리는 신입생 환영회 등을 통해 남녀 학생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때로는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돼 퇴학 처분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에는 4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지혜형으로 자기 전공학과를 활용해 돈을 버는 것인데, 이를테면 전자공학과 학생은 전자제품을 수리해 주고 돈을 벌고 수학과 학생인 경우 가정 교사를 하는 것 등이다.
둘째는 상업형으로 이것은 학생들끼리 돈을 갹출해 교내에서 코피숍이나 문방구 등을 경영하는 것이다.
세째 유형은 노동형으로, 말하자면 공사판이나 시장 등에서 육체 노동으로 용돈을 버는 경우고, 네째 유형은 투기형으로 전자제품 등을 싸게 사서 높은 이문을 붙여 되팔아 용돈을 버는 유형이다.
개방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이후 번성하기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는 교수·학생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명예를 망각하고 너무 돈에 눈이 어두워져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반면에 학생들은 『학비는 무료지만 책값·데이트 비용·디스코테크 비용 등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다』며 맞선다는 것.
중국의 대학에서도 입시 경쟁이 치열해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은 학비와 기숙사비가 면제되는 국·공립 대학에 갈 수 있는 반면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학비를 개인이 부담하는 사립대학으로 간다.
중국의 대학가도 때때로 정치적인 이유나 학생 복지 문제 등을 이슈로 시위가 벌어지는 데 일단 학생들의 의견을 모은 뒤 전교생이 거의 모두 참석해 시위를 벌인다는 것.
북경대 역사학부 3년 이동희 군에 따르면 지난 87년1월2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북경대생 1만여명이 북경시의 중심지에서 40여km떨어진 북경대에서 북경 시내 천안문광장까지 40여km의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때의 시위는 반체제 천문학자 방려지 교수의 영향을 받아 학생들이 부패 관료 척결과 개혁을 요구하며 수천명의 경찰과 대치, 치열한 몸싸움 끝에 천안문 광장에서 학교로 되돌아갔다는 것.
그러나 중국 대학생 시위에서는 돌과 화염병 및 최루탄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편 학생들은 개방화 풍조에 따라 디스코를 즐기기도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주말이면 디스코테크를 찾는다.
우리 일행 중 6명은 북경 도착 3일째 저녁, 한 택시 운전사의 소개로 북경 시내 중심가의 한 디스코테크를 찾아보았는데 많은 젊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서양의 록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 올림픽 때 불러졌던 『핸드 인 핸드』도 불려지고 있었으며 디스코테크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 5천∼6천원으로 비교적 비싼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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