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0종 풀·나무 이름 줄줄 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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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꽃창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한택식물원 수생식물원에서 이택주(右).이용문 부자가 작업 도중에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만 평의 식물원에 심어져 있는 8300종의 초본류와 나무의 이름, 생태를 줄줄 꿰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데 아직 없어서 걱정이야. 자식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 혼을 내지만 그런 걸 잘 몰라줘, 끈기도 없고…."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있는 동양 최대 식물원인 한택식물원 이택주(64) 원장은 옆에 외아들 용문(35)씨가 앉아 있어도 아들 칭찬보다는 식물원을 끌고갈 전문가가 없다는 걱정부터 했다. 용문씨는 아버지를 따라 식물원에 평생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식물원에서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이 원장은 28년간 국내 자생식물을 비롯, 각국의 식물종을 확보해 지금의 식물원을 일궈냈다. 국내 식물학계에서는 국가도 못하는 일을 해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직접 식물을 채집하고 키우는 데 28년을 보낸 그의 눈에는 식물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이제 몇 년 안 되는 아들이 햇병아리처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기자가 식물원 여기저기를 용문씨와 동행하면서 식물의 이름과 생태를 물어보면 막힘이 없었다. 아버지가 용문씨를 어린아이로 보지만 어느새 전문가가 돼 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고 놀이공원이 아닌 정통 식물원을 열어 돈 버는 곳은 없다. 식물원을 하려면 전국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녀야 하고, 식물원에 있을 때는 종일 땅 파고 씨 뿌리고 가꾸고 잡초를 뽑아야 한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대를 이어 정통 식물원을 하는 사람도 용문씨가 처음이다. 용문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싫어 대학 전공도 전자계산학과를 택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평생 칭찬받는 일이 될 것"이라는 아버지 친구의 말씀에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대학원 원예학과에 들어가 2002년 석사과정을 마쳤다. 용문씨가 하고 싶다고 해서 이 원장이 그냥 받은 게 아니다. 이 원장은 약 6개월 동안 일부러 전국의 산으로 용문씨를 데리고 다니며 마음가짐 등을 시험했다.

이 원장은 용문씨와 마주 앉아 돈만 들어가는 식물원을 계속한 이유를 "1980년대 주변에서 '대단한 일을 한다'는 등 붕붕 띄워주는 통에 식물원을 접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재단법인 한택식물원에 내 전 재산인 20만 평(식물원으로 쓰고 있는 약 800억원 상당)의 땅을 곧 기증할 거야. 그렇게 되면 이 땅은 식물원 외에는 할 수가 없어. 재단법인의 특성상 정관을 맘대로 바꿀 수가 없거든." 이 원장이 전 재산을 재단에 내놓겠다는 말에도 용문씨는 고개만 끄덕인다. 유산을 받을 게 없으니 서운한 기색이라도 내비칠 만한데 이미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아버지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한 때는 식물원 안에서도 아버지가 안 보이는 쪽으로 피해 가서 일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결재를 받기 위해 식물원 작업장에 거의 나가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야 하지만…."

호주 식물 온실에 있는 바오밥 나무와 어린왕자 인물상.

이 원장은 기상캐스터가 틀린 일기예보를 할 때 가장 밉다고 했다. 주말에 비도 오지 않는데 온다고 해 관람객이 크게 준다는 게 이유다. 수입이라고는 관람료밖에 없는데 '외출을 자제하라'는 등 기상캐스터의 말은 속을 팍팍 긁어 놓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한택식물원이 운영되려면 연간 35만 명의 관람객이 와야 하는데 현재는 20만 명 안팎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돈이 다 떨어져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정원 공사를 해주기로 하고 공사비를 미리 받아 메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택식물원의 직원은 40여 명이며, 잡초를 뽑는 일용직을 하루에 15명씩 쓴다.

"죽기 전에 재정적으로나 식물종 확보와 가꾸기 측면에서 안정적으로 만드는 게 가장 큰 과제야. 국내 모 수목원을 봐. 설립자가 사망하자 엉망이 되어버렸잖아."

이 원장의 고민이 절절히 배어 나온다. 용문씨는 "관람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식물 분류에 따라 만든 현재의 가든 방식 외에 흥미를 끌 수 있는 식물을 종별로 구분하지 않고 섞어 심은 가든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이 원장은 "놀이공원식으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 원장은 "과기부가 식물에 거의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중국에는 천산 꼭대기, 사막에도 식물연구소가 있다"고 말했다.

식물에 반평생을 바친 이 원장과 이제 그 길을 이어 가기 시작한 아들. 두 사람의 쉼 없는 식물 여행은 우리나라의 큰 자산인 식물종의 확보와 보전에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한택식물원=자생식물 2400종과 5900종의 외래식물 등 총 830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한 동양 최대 식물원. 학계와 연구소에 자생식물 등을 연구용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백두산 식물에서부터 호주 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택주 원장=한양대 토목과를 졸업한 뒤 건설업을 했다. 식물원은 건설업을 하면서 사 놓은 20만 평의 땅에 다양한 식물을 심어 가꿔 보자는 소박한 생각으로 1979년 출발했다. 그러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의 아름다움과 강인한 생존력에 푹 빠져 들었다. 그가 식물원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것도 자생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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