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건국 강령이 기초 삼균주의 창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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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정부는 지난 9일 그동안 납북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포상이 미루어져 왔던 독립 유공자 22명을 포상키로 의결했다. 조소앙·김규식·안재홍 등 한국인이라면 이름을 모를 사람이 거의 없는 혁혁한 항일투쟁 독립의 공로자들이 다수 포함된 이번 포상 결정은 왜곡된 우리 근대사가 바로 잡혀 나가는 신호라고 할만큼 큰 의미를 지닌다.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3·1절을 전후해 민족해방과 건국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다 바쳤던 선열들의 업적을 되살리는 기회를 마련했다.<편집자주>
중국 계문의 삼민주의는 알면서도 우리 나라의 대표적 정치사상가인 조소앙(본명 용은)의 삼균주의(정치·경제·교육의 균등)를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이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임시정부 건국 강령의 기초가 된 사상인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이 의문의 해답은 우리 나라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찾아진다.
45년 해방 때 국내의 상황은 3·1운동 이후 심화해 온 좌·우의 대립에다 전비한을 각각 점령해 자신들의 이념과 체제를 관철시키려 했던 미소의 대립으로 중도적 입장의 정치세력이 설 땅은 점점 좁아지는 형국이었다.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던 1940년 전후 임정의 주도 세력은 건국 이후 국가발전을 극대화하기 의한 건국 강령을 내놓았고 이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좌익의 건국구상도 포괄하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건국전후까지의 과정에서 이러한 임정의 중도적 입장은 점차 미소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좌·우익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 6·25동란과 함께 완전히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와 함께 임정 건국 강령의 기초가 된 삼균주의도 현대사의 뒤안길로 밀쳐져 버리고 만 것이다.
삼균주의를 창시한 조소백은 1887년 양반관리 가문에서 출생했다.
1902년 성균관에 입학, 신채호 등과 함께 공부했고 1904년 도일, 1926년 명치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일본에서의 학창시절 그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음모를 폭로하고 북일 활동을 고취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었다.
1913년 상해로 망명한 이후 중국 혁명 지사들과 함께 북일 단체를 구성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1917년 스웨덴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석해 한국문제를 의제로 제출, 통과시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후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초대 국무원 비서장·외무부장·내무부장·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했고 1929년 심구·안창호·심두봉 등과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이론가로,또 임정의 외교담당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45년 귀국 후에는 한국 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48년에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 김구·김규식과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 독립당을 탈당, 사회당을 창당(48년)하고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6·25전쟁 발발직후 납북돼 북한에서 58년에 별세, 평양 근교에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남한에 생존중인 유족들은 지난 84년 경기도 양주군에 가묘를 만들어 모시고 있다).
이처럼 평생을 바쳐 독립투쟁과 통일된 국가수립을 위해 정열적인 활동을 벌인 조소앙에 대한 평가는 75년 고 홍선희 교수(고대) 의 『조소앙 사상』이 출간되기까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의 균등화를 이룩하고, 토지국유화와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경제의 균등화를 이룩하고,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의 실시로 교육의 기회를 균등화함으로써 개인간의 균등화·민족간의 균등화·국가간의 균등화를 실현하려는 삼균주의는 조소앙이 평생의 민족해방 운동 과정에서 다듬어져 민족 운동 전선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되고, 임정의 건국 강령 토대가 되는 실천적 정치이념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평가다.
남북의 극한 대치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양쪽으로부터 배척받아 한때 고사의 위기에 처했던 삼균주의는 80년대 들어 그 내재적인 재생력 때문에 새롭게 그 의미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조소앙의 가문은 일가 거의가 독립 유공자다. 형님 조용하는 미주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으로, 동생인 조용주는 국내와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으로 대통령 표창을, 막내동생 조시원은 광복군 활동으로 국민장을, 큰아들 시제와 막내아들 인제도 광복군 활동으로 각각 건국 포장과 국민장을 오래전에 받았다(현재 인제씨만 생존)·인제 옹은 73세로 서울 노원구 창동에서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소백이 독립유공자로서는 최고의 대우인 대한민국장을 받게된 것은 뒤늦게나마 그동안 우리가 사시와 편견으로 보아왔던 우리 현대사를 재정립하는 의미가 있다.<강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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