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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조정으로 시효 넘겨 강제징용 소송 막자" 문건나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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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지난달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3명 사망)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사진 중앙포토]

대법원은 지난달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3명 사망)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사진 중앙포토]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낸 민사소송에 대해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켜 소멸 시효를 넘기려 했던 문건이 6일 공개됐다.

 이날 공개된 '장래 시나리오 축약(대외비)' 문건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을 기산점으로 삼아 민법상 소멸 시효(3년)가 지나도록 재상고심 결론을 미루는 방안을 구상했다. 2012년 5월 기준으로 3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만 구제되고 나머지는 소멸 시효가 완성돼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문건은 당시 차한성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에 찾아가 해당 방안을 논의하고 온 직후인 2013년 12월 사법정책실에서 작성한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재상고심 결론을 미루는 구체적 방안으로 위자료 액수 문제를 지적했다. 파기환송심이 1억원으로 책정한 위자료 액수를 문제 삼아 사건을 고등법원에 돌려보낸 뒤 화해나 조정을 시도해 시간을 끈다는 계획이다. 법원행정처는 위자료 액수에 대해 “6·25 당시 학살 등 과거사 사건과 비교해 위자료 액수 과다 판단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5000만원 정도를 책정한 일본의 화해·조정 결정을 참고할 수 있다”며 “대법원 파기 환송과 조정을 거치는 동안 나머지 피해자들은 소멸 시효가 완성돼 소송 제기가 불가하다. 독일 같은 정도의 적정한 보상금 지급(300만원 정도)로 갈음 가능하다”고 적었다.

법원행정처는 소송 대신 한일 양국 정부와 일본 기업이 함께 출연하는 재단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했다. 20만명으로 추산되는 피해자들에게 모두 1억원씩 지급할 경우 20조원에 달하는 재원 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관련 판결이 시효 안에 확정되고 추가 소송이 이어질 경우 한일관계 악화와 함께 1965년 청구권 협정의 정당성 훼손을 우려한 박근혜 청와대의 의중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소멸 시효를 활용해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봉쇄하려던 정부의 문건이 공개되면서, 법조계 안팎에선 실제로 이런 의도가 재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되면 소송을 제 때 내지 못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지상 기자 groun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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