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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도 마윈도 열혈팬···15억명이 슬퍼한 작가의 죽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4억9000만명이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다.
총칼로 천하를 평정한 영웅호걸도 아니고 사업을 일으켜 부(富)를 축적한 자산가도 아니었으며 고담준론으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논객도 아니었다. 한 자루 필봉으로, 그것도 통속 장르라고 폄하받기 일쑤인 무협 문학으로 일가를 이룬 진융(김용ㆍ金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지난 30일 94세를 일기로 영원히 강호(江湖)와 결별했다.

中무협작가 김용 추모 열기 #중화권 신문 일제히 1면톱 #'별세 애도' 해시태그 14억9000만건

진융의 별세 소식을 1면 머리 뉴스로 전한 중국 일간지들.

진융의 별세 소식을 1면 머리 뉴스로 전한 중국 일간지들.

31일 오후 3시 현재 트위터와 유사한 중국의 모바일 서비스인 웨이보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해시태그가 14억 9000만 건에 이르렀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불과 20시간 여만이다. 중국 대륙의 네티즌 인구가 8억명 남짓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어를 구사하는 지구촌의 모든 인구가 한 두번씩 인터넷 공간에 추모 글을 남기거나 리본을 단 셈이다.

중화권 언론들은 31일자 조간에서 일제히 진융의 별세를 1면톱 기사로 다뤘다. 중국 대륙의 신문은 물론 중국어로 발행되는 싱가포르 최대 권위지 연합조보조차도 1면 톱 기사였다. 이 신문은 “진융의 대표작 ‘사조영웅전’은 싱가포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부분 전재되어 (화교 후예가 인구의 70%인) 싱가포르 청소년들로 하여금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한 기여를 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실제로 중국어권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였다. 중국출판과학연구소 전국 조사에서 진융은 바진(巴金), 루쉰(魯迅), 충야오(瓊瑤)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그가 압도적인 사랑을 받은 건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의 빼어난 문장이다. 그 어떤 작가 보다도 진융의 문장은 중국어의 미학을 살린 유려(流麗)함과 유장(悠長)함이 있었다는 평가다. 하바드대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중국 문학 전공자들에게 진융의 작품이 텍스트로 채용된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진융의 작품을 원전으로 읽은 국내의 한 애호가는 “중국어 원문과 한국어, 일본어 번역문을 대조해 읽었는데 그의 문장이 주는 참맛은 번역문에선 도저히 살릴 수 없다”며 “한국판에서 번역이 어려운 부분들은 그냥 건너 뛴 대목도 적지 않게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의 문장의 바탕은 중국 역사와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탄탄한 인문학적 ‘내공’이 바탕이 되었기에 개별 문장마다의 수려함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격조가 넘쳤고, 거기에 압도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넘치는 서사(敍事), 즉 스토리텔링이 결합됨으로써 작품의 흡인력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진융이 숨지자 중국의 한 시기를 이끈 개혁 개방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도 열렬한 애독자였다는 사실이 새삼 화제가 됐다.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진융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다. 1981년 진융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진융의 작품은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그는 당대 홍콩의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에 비판적이었다. 진융은 자신이 1966년 창간한 일간지 명보(明報)에 “문혁은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이 때문에 67년 홍콩에서 중국 공산당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반(反)영국 폭동이 벌어졌을 당시 좌파 진영에 의해 암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진융과 같이 저장(浙江)성이 고향인 마윈(馬雲) 알리바바 그룹 회장 역시 진융의 열혈 팬이다. 마윈은 “진융에 의해 고취된 무협 정신은 알리바바 그룹의 핵심 가치가 됐다”며 “진융은 오랜 시간 나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었고, 그는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마윈은 알리바바 그룹의 고급간부 모두에게 소설 속에 나오는 무술가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여줬으며 그 자신도 진융의 소설 주인공인 검술의 달인 펑칭양(風淸揚)을 별명으로 택했다.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람(林鄭月娥) 행정장관도 성명을 내고 “진융의 사망 소식에 크나큰 슬픔을 느낀다”며 “홍콩 정부를 대표해서 진융의 유족에 가장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중국 대륙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화권 뿐 아니라 진융에 대한 추모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온라인에 댓글을 남긴 한 네티즌은 “중ㆍ고생 시절 나의 시험 성적을 떨어뜨린 장본인이 바로 김용이었다”며 “밤을 하얗게 새워 김용의 작품을 읽고 찬탄하던 시절이 그립다”고 적었다. “정의와 불의의 싸움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역사는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지 등 청소년기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하는 팬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사조영웅전’등 3편을 묶어 나온 ‘소설 영웅문’이 1985년 출간돼 선풍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 15편이 모두 번역돼 나왔다.
진융은 소설 작품 이외에도 많은 글을 남겼다. 30여 년간 명보 주필로 재직하며 칼럼과 사설을 필명으로 게재한 것을 비롯 숱한 글을 썼다. 때문에 그는 “전집 출판이 영원히 불가능한 문필가”란 평가를 받는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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