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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달러없인 호텔서 콜라 한잔도 못마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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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레닌그라드 시내에서는 물자가 그렇게 귀해도 호텔에는 참 좋은 물건들이 많다.
외국에서 수입한 것들이 대부분으로 예컨대 시내에선 콜라 마시기가 힘들어도 호텔에선 펩시콜라를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물건들은 달러로만 살수 있지 루블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통하지가 않는다.
호텔에선 또 달러 외에 비자니 아맥스니 마스터스니 다이너스클럽이니 하는 카드로도 계산이 되는 모양인데, 그런 카드가 어떻게 돈이 되는지 그는 잘 이해가 안간다.
그와 같은 소련시민은 달러를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다. 바꾸는 길은 단 한가지암달러상을 통하는 것이지만 그는 아직까지 한번도 암달러상과 거래해본 적이 없다.
어제 남조선기자들한테 들었더니 호텔 환전하는데서는 0·6루블을 1달러로 쳐 바꾸어준다고 한다. 하지만 시중에선 1달러가 보통 5∼6루블씩 하는 것을 그도 알고있다.

<암달러시세 10배>
그러나 그도 딱 한번 외국돈을 바꾸어 손에 쥐고 써본 적이 있다. 2년 전에 동독으로 2주일간의 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유일한 외국여행이었다.
외국여행 허가를 받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때는 동독의 친구가 초청장을 보내주어서 갈수 있었는데 돈을 바꾸려고 해보니 여행일정. 하루당 15루블까지만 바꿀 수가 있었고, 따라서 1루블에 3·3마르크씩 쳐서 하루 49·5마르크씩을 들고 갔었다.
돈 말고 갖고 나갈수 있는 물건도 제한이 있어 모두 5백루블어치까지만 선물로 들고 나갈 수가 있었다.
레닌그라드에는 한국사람들이 한 3백명쯤 산다.
명절 같은 때는 다는 아니지만 서로들 모여 어울린다. 한인회같은 조직은 아직 없고 가끔 서로들 그런 조직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러나 누가 한사람 발벗고 나서야 되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
그는 아버지 이름으로 된 제주도의 땅문서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전부 한자로 되어있어 그는 잘 읽지 못하겠고 그것을 남조선기자들을 만날 때 보여주고 알아보려 했는데 그만 깜박 잊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가기전에 제주도에 사놓았던 땅이라고 들었는데 언젠가 그 땅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그는 가끔 땅문서를 들여다보며 생각하곤 한다.
그의 아버지는 늘『한국사람들은 농사를 지어야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대도시거주 선호>
실제로 그의 부모는 사할린에서 농사를 지어 그를 비롯한 아홉 남매를 다 훌륭하게 공부시켰고 그런 부모덕에 그 자신도 오늘날 이렇게 중상류정도의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됐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할린같은 데를 잘 안가려고 한다.
같은 노동을 해도 사할린에서는 월급이 2배다.
그런데도 소련사람들은 누구나 대도시에서 살려고만 한다.
도시와 시골이 모든 면에서 그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동차처럼 집도 많이 모자라 낡고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들이 모여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좋은 직장 찾기도 매우 힘들다.
봉급 수준이나 하는 일로 보면 「중상」정도의 직장을 갖고 있는 소련 시민임에 틀림없는 그의 집은 10평방m 넓이의 정지(그는 「주방」이란 말을 잘 모른다)에 각각20, 14평방m 짜리인 방 두개, 그리고 매우 좁은 욕실과 화장실이 따로따로 있는 아파트다.
김광조씨의 차를 타고 그의 아파트입구 바로 앞에서 내릴때까지도 이곳이 아파트로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아무 표시도 없는 붉은 벽돌의 5층 건물인데, 인적도 없는 건물 바로 앞의 빈터에는 쓰다버린 큰 공작기계 같은 것만이 하나 덩그러니 있다. 꼭 무슨 공장창고의 뒷마당 같은 모습이다.
아파트입구의 현관문은 나무판자들로 몇 군데를 대서 막은 유리가 없는 나무문이어서 아파트앞의 공간이 공장창고의 뒷마당 같다는 느낌을 더해준다.
그런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서 오르는 돌계단은 어둠침침한 조명과 퀴퀴한 냄새속에 매우 낡아있다. 여기저기 균열이 가있고, 수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계단이 중간중간에 많이 끼여있다.
나무로 된 계단난간은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이미 오래전에 목재의 본디 색깔을 잃었다. 기자가 그의 집인 4층까지 오르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지금은 한낮인데 이상하게도 그가 살고있는 아파트에는 밖이나 안이나 인적이 없다.
계단을 오르면서 마주치는 아파트 각 호의 현관문들은 제각각이다.
아파트입구의 현관문처럼 나무판자로 된 것도 있고 철판으로 둘러싸서 짙은 색깔의 페인트로 칠해놓은 것도 있다.
호수표시도 제각각이어서 낯선 사람이 얼른 보아서는 첫눈에 호수 알아보기가 힘이 들고 개중에는 마치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씌어져있는 것도 눈에 뛴다.
그의 집 현관에는 신발장과 소련인들의 필수품인 털모자를 얹어놓는 모자장이 층층이 놓여있다.
모자장 높이의 바로 옆 벽면에 외투 등 겉옷을 걸어놓을 수 있도록 7∼8개의 옷걸이가 죽 박혀있다.
이렇게 신발 벗어두는 곳과 신발장·모자장·외투걸어두는 곳이 현관입구의 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어 그의 집을 들어서면 그 자리에 서서 한바퀴 돌며 신발을 벗고 모자를 얹은 다음 외투를 벗어 걸어야 한다.

<호수표시 제각각>
마루는 어른 두 사람이 서로 옆으로 몸을 돌려 지나쳐야 할 정도의 너비다.
그 마루의 한쪽끝이 「정지」다. 마루를 따라 오른쪽으로 방 두개가 연이어 있고, 왼쪽으로는 아파트 문이 나있으며 계속해서 욕실과 화장실이 따로따로 있다.
「정지」에는 빵을 굽는 오븐이 함께 붙어있는 가스레인지와 용량이 2백ℓ쯤 됨직한 냉장고가 각각 한쪽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싱크대는 없이 크기나 모양이 세면대 비슷한 설겆이통이 한군데 있다.
냉장고나 가스레인지는 얼른 보기에도 꽤 오래된 것이다.
한쪽 구석에 국수기계가 있다. 그의 식구들은 국수를 즐겨먹는다. 보통 뜨거운 사골국물에 국수를 말아 다진 쇠고기를 얹어 먹는다.
빵은 잘 먹지 않고 밥을 먹을 때가 더 많은데 국은 거의 언제나 양배추와 감자, 쇠고기를 넣고 끓이는 국이다.
다른 국거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고사리는 레닌그라드에서도 싸고 흔하지만 조개젓·무나물무침·깻잎과 같은 반찬들은 사할린이나 타슈켄트에서 소포로 부쳐오는 것이다.
고춧가루 역시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타슈켄트에서 주문해 먹는다.
20평방m짜리 큰방은 거실겸 식당이다. 이곳에서 식사도 하고 식구들이 모여 앉아 TV를 본다.
여덟사람은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방의 4분의1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식탁의자 4개와 일 자형 소파가 하나있다.
한쪽옆에 그의 부부가 함께 쓰는 낡은 옷장이 하나 있는데 그는 신사복이 3벌, 넥타이가 4개있고 그의 부인이 입는 원피스 같은 옷이7∼8벌 걸려있다.
14평방m짜리 옆방이 침실이다.
딱 한사람 정도 잘만한 철제침대위에 이불과 모포를 깔아 놓았는데 여기서 그의 부부가 함께 자고 9세짜리 막내「예브게니아」는 침대옆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잔다.
대학에 다니는 장남은 학교 기숙사에 있으니까 집에선 자지 않는다.
또 한쪽으로는 옷장이 모자라 미처 다 집어넣지 못한 아이들 옷과 내복·양말 등을 그냥 쌓아놓았다. 깨끗이 빤 것들이고 양말들은 대부분 기워져있다.

<욕실은 매우 좁아>
화장품은 거의 볼수가 없다. 얼른 눈에 띄는 것은 ponds 크림 1백㎖짜리 한통과 메이커 표시가 흐릿한 립스틱 4∼5개뿐인데, ponds 크림은 최근에 구한 것인지 한번도 쓰지 않은 새것인채로 있다.
침실 맞은 편의 욕실과 화장실도 매우 좁다.
욕실에는 얼굴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 흐릿하고 작은 거울하나가 벽에 붙어있는데 거울밑의 작은 받침대에는 안전면도기만이 하나 놓여있다.
세면대 옆의 욕실구석으로 하얀 색깔의 세탁기가 한 대 있다.
화장실에는 좌변기만이 하나 있다. 사람이 한사람 들어가 앉으면 꼭 될만한 공간이다.
수세식인 변기는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엉덩이 받침대는 원래의 짝이 아니고 합판을 같은 모양으로 잘라 댄 것이다.
중앙난방식인 그의 아파트는 방마다 스팀이 있어 겨울에도 전혀 춥지 않은데 화장실만큼은 스팀이 없다.
그는 그 자신이나 자신의 식구들이 입는 옷, 먹는 음식, 사는 집 등의 생활수준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마치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그런만큼 무슨 큰불만이나 큰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게 다 나아져야지 이게 어디…. 「브레즈네프」때는 사회주의 혁명이 도대체 다 뭐 한거냐는 불만이 많았어요. 요즘 「고르바초프」가 뭔가 하려고 하니 그런 불만이 많이 없어졌지만 좀 나아지는 걸 우리애들때나 볼까, 우리 살아서는….』【끝】
글 김수길 특파원|사진 장남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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