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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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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함석헌옹의 자필 이력서를 본다. 1901년 3월13일생, 평북용천다사도 출생, 종교 퀘이커, 취미 화초, 자녀 2남5녀, 학력 평양고보중퇴·정주 오산학교졸·동경사범문과졸. 경력 속에 조국수호 국민회의 대표위원·민주수호위 대표위원을 길게 적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아호가 「바보새」인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함옹은 바보새 옆에 「알바트로스」라는 영문까지 적어 놓았다. 이 새는 바다에 살면서도 고기를 잡아먹을 줄 모른다. 하늘을 어슬렁어슬렁 날고 있다가 갈매기가 먹다 놓친 고기를 주워 먹는다. 중국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산다고 이 새를 「신천옹」이라고도 했다.
작고한 장준하씨(사상계 사장)가 소개한 함옹의 별명도 있다. 평북 오산학교 재직시절 학생들은 함선생을 『함도깨비』라고 불렀다. 모르는 것 없이 신출귀몰한다는 뜻이다. 바로「함도깨비」선생이 학생들로부터 매를 맞았다.
오산학교에 동맹 휴학사태가 빚어졌을 때의 일이다. 학생들은 교무실로 몰려들어가 선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했다. 교사들은 재빨리 도망했는데 「함도깨비」만은 눈을 감고 혼자 앉아있었다.
뒤늦게 학생들은 함선생에게 사과하러 갔다. 그때 함옹이 눈을 감고 있었던 이유를 학생들이 물었다.
『나는 아직 수양이 모자라 성인들처럼 너그러울 수가 없네. 자네들한테 맞은 일은 별것 아니지만 나를 때린 학생이 누군지 알면 앞으로 그 학생을 대할 때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함옹의 저작생활은 불길같았다. 무려 24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는 『지평선 넘어』라는 시집도 있다. 「셸리」의 시 『서풍에 부치는 노래』는 함옹의 번역을 따를 것이 없다. 함옹은 문필가·시인 말고도 민족운동가로, 민주투사로, 웅변가로, 종교인으로 질풍노도와 같은 생애를 보냈다.
그의 『뜻으로 본 한국사』(1950년)는 「고난사관」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만큼 고난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민중은 고난 속에 깨어난다는 것이 그의 역사철학이다. 구어체로 쓰이는 그의 글은 박진감과 호소력을 더해 읽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한다. 88세, 그는 깨어있는 민중의 위대한 역사도 다 못보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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