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살포시 안긴 자연을 닮은 조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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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해리스의‘초승달’. 땅에서 살짝 들린 곡선이 우아하다.

푸른 잔디에 배부른 임산부가 누웠다. 만삭의 배 위에 손을 얹은 여성은 '달의 여신, 할리야'다. 필리핀 조각가 아그네스 아렐라노는 흰 화강석으로 대지의 어머니이자 생명의 어머니를 빚었다. 땅과 맞닿은 여신은 생명의 신비와 순환을 몸으로 말한다. 영국 작가 리차드 해리스의 '초승달'은 땅에서 살짝 들린 우아한 곡선이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땅으로 스며든다. 그 틈새로 거울처럼 대지를 비춘다.

27일 막을 올린 2006 부산비엔날레 부산조각프로젝트는 이처럼 '대지에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 20점이 에이팩(APEC) 나루공원에 펼쳐졌다. 높이 치솟아 보는 이와 자연을 압도하던 거대 야외조각이 아니라 땅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가 사람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생태조각이다. 이태호 전시감독은 "지구와 우주의 환경과 생태, 조화와 질서를 생각하고 존중하는 자리가 되도록 작가들과 의견을 나누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주민이 자연 속에서 만지고 통과하며 느낄 수 있는 '녹색 박물관(Green Museum)'이 되도록 애쓴 점이 올 부산조각프로젝트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칸 야수다의 ‘고요한 강’. 일본에서 희생된 한국인 징용자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다.

참가 작가들이 여러 차례 작품이 놓일 부산 현장을 찾아 장소에 맞춤한 조각을 구상한 것도 이번 조각프로젝트가 성공한 까닭이 됐다. 일본 작가 칸 야수다는 일본에서 희생된 한국인 징용자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 '고요한 강'을 내놨다. 그는 가고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흘려보내는 '너그러운 손바닥'으로 자연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이스라엘 작가 미하 울만은 남과 북 방향으로 땅에 박은 집 모양의 철판 조각 '나침반'에 남과 북으로 갈린 한반도를 담았다. 정수모.정하응.송필 세 명의 한국 작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인체 모양의 길 '눕다'를 부산 시민들과 함께 만들었다. 땅에서 솟은 인류 최후의 화분처럼 보이는 김광우씨의 '숨쉬는 땅', 바람에 따라 변하는 맘모스를 만들어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인류의 오만을 경고한 백성근씨의 '태고' 등 전시장은 사유의 산책길이 되고 있다. 051-888-669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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