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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다산 유배·해배길 걷기 … 청렴정신 널리 퍼졌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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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호 25면

[박정호의 사람풍경] 윤동옥 다산동호회장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길. 몸체를 어지러이 드러낸 나무뿌리를 밟지 않으려, 또 무수히 박힌 돌 조각을 피하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올라가는 산길 중간에 정호승의 시비 ‘뿌리의 길’이 보인다.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나도 눈물을 닦고/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정약용의 외손 #다산실학 공부하며 인생 2막 열어 #10년간 학생 등 5만여 명에게 알려 #다산 해배 200년 #강진서 남양주 생가까지 2주 장정 #일반인들 일일 체험 코스도 마련 #다산의 유산 #효도·우애·사랑이 다산정신 요체 #지위 높을수록 조심하고 경계해야

다산초당은 한국실학의 커다란 뿌리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애민사상이 배태된 곳이다. 여기서 ‘다산의 나뭇잎’ 하나가 되려 하는 촌노(村老)를 지난 8일 만났다. 다산의 외손인 다산동호회 윤동옥(61) 회장이다. 그가 올 개천절에 초당 왼쪽에 심은 복숭아 묘목 두 그루를 보여줬다.

윤동옥 다산동호회장 뒤로 다산초당의 정약용 초상이 보인다. [프리랜서 오종찬]

윤동옥 다산동호회장 뒤로 다산초당의 정약용 초상이 보인다. [프리랜서 오종찬]

대표작『목민심서』나온 지 200주년

갑자기 웬 복숭아 묘목이죠.
“다산이 경기도 남양주 생가에서 회갑을 맞을 때 강진에서 제자들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고받은 말을 모은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을 보면 다산이 제자들에게 ‘(초당의) 복숭아나무는 혹 시들지 않았느냐’ ‘연못 속 잉어 두 마리도 많이 컸겠구나’라고 물어보았죠. 다산은 그만큼 세밀한 분이었습니다. 다산 해배(解配) 200년을 기념하는 제 나름의 의식이라고 할까요. 없어진 복숭아나무를 다시 봤으면 해서요. 혹시 아나요, 3년쯤 지나 복숭아 열매가 맺힐지요.”
또 다른 아이디어도 있나요.
“초당 양쪽 언덕에 원래 채마밭이 있었습니다. 초당 앞에는 미나리밭도 있었고요. 실학자 다산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채소도 직접 길러 먹으며 언행일치·지행합일을 실천했어요. 기회가 되면 그 밭도 복원하고 싶습니다. 문화재 주변을 제가 손댈 수는 없지만요. 다산과 교류한 초의 선사가 1812년 그린 ‘다산초당도’를 보면 초당 올라오는 길에 버드나무 네댓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것도 새로 심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한마디 한마디가 생생하다. ‘다산의, 다산에 의한, 다산을 위한’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사람답다. 직계가 아닌 외손임에도 다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알려진 대로 다산은 강진에서 거듭 태어났다. 유배 18년이란 고난을 딛고 실학을 집대성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방대한 저술로 남겼다. 그때 큰 도움이 됐던 집안이 해남 윤씨다. 다산의 하나뿐인 딸도 강진의 해남 윤씨와 혼인을 했다. 외손자 방산(舫山) 윤정기(1814~1879)가 다산학을 계승했고, 윤 회장은 방산의 방계 후손이다.

다산초당 전경. [중앙포토]

다산초당 전경. [중앙포토]

윤 회장은 지난 10일 강진을 떠나 21일 경기도 남양주 다산 생가(여유당)까지 걸어간다. 다산 해배 200년 도보단 대표를 맡았다. 특히 올해는 다산의 대표작 『목민심서』가 나온 지 200년 되는 해. 1818년 음력 9월 2일(양력 10월 10일) 무렵 강진에서 출발한 다산은 2주일 후인 14일께 한강 두물머리 생가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번 여정은 400여㎞, 천리가 넘는 길을 따라가며 다산의 높은 뜻일 되새길 작정이다. 9일 강진에선 일종의 송별연, 즉 길놀이와 국악공연도 열렸다.

젊어서부터 다산을 품어왔나요.
“아닙니다. 별 관심이 없었어요. 고등학교를 나와 객지에서 인쇄업·벽돌제조업 등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20여 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어요. 그때 선친이 남긴 가승(家乘·가계기록)을 만났습니다. 우리 집안 내력이 적혀 있었죠.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습니다.”
무슨 공부를 했나요.
“농사를 지으며 짬짬이 배웠습니다. 향토사학자 양광식 선생에게 강진의 역사를 배우고, 연세대 국학연구원 부설 다산실학연구소 강의도 빼놓지 않고 들었습니다. 틈틈이 한자도 익혔고요.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10년 전 시민강좌를 열고, 다산동호회를 만들었습니다. 문화해설사로도 나섰고요. 공무원·학생·관광객 등 지금까지 5만여 명에게 다산을 알린 것 같습니다.”

채소 직접 길러 먹으며 지행합일 실천

초의 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 [중앙포토]

초의 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 [중앙포토]

8년 전 유배길 체험도 했던데요.
“2010년 11월 5일 서울 제일은행 본점(조선시대 의금부 터)에서 출발해 22일 다산초당에 도착했어요. 18일간의 장정이었죠. 그때 8년 뒤 해배길도 걸어보자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루게 됐네요. 다산의 근검·청렴 정신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산의 저작을 다 읽어봤습니까.
“어딜요, 그 많은 500여 권을 어떻게 독파합니까. 제가 다산 전공학자도 아니고요. 사실 전문가들도 다산의 부분 부분을 연구하지 않나요. 다산을 공부하면서 저를 많이 돌아봤습니다. 다산 다산 하고 다니면서 허튼 모습을 보일 수 없잖아요. 예전엔 성격이 급하고 괄괄했는데 요즘엔 스스로 자제하게 됩니다. 주변에선 저를 ‘윤다산’ ‘윤박사’라고 부르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려요.”
지난 9일 강진에서 열린 해배길 걷기 길놀이. [강진군청]

지난 9일 강진에서 열린 해배길 걷기 길놀이. [강진군청]

유배길 걷기에서 뭘 배웠나요.
“사전답사 3개월을 했지만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 컸습니다. 몸이 힘든 건 둘째 치고 매일 밤 다음 날 걸어야 할 길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어요. 제가 잘못 들어도 다른 사람이 그대로 따라오게 되잖아요. 지도자의 책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한낱 도보단장도 그런데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는 얼마나 더할까요. 높을수록 더 조심하고 경계해야죠. 그게 다산정신 아니겠습니까.”
해배길도 만만한 코스가 아닙니다.
“옛길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원래 다산이 걸었던 길이라 할 수 없어요. 8년 전엔 무식이 용감이라고 4차선 도로도 무작정 걸었는데, 이번에는 최대한 안전에 신경 쓰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20여 명이 함께하는데 모두 완주하지는 않습니다. 중간중간 일일 참여도 환영합니다. 연락(전화 010-3379-2218)을 주시면 매일 오전 10시 주요 결집지에서 픽업해 드립니다.”
다산의 유산을 간추린다면요.
“제 능력 밖이 아닐까요. (웃음) 저는 깨우침을 강조합니다. 다산은 ‘학야자는 각야(學也子 覺也)’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이죠. 머리가 좋으면 공부에 소홀하고, 잔머리를 굴릴 수 있습니다. 우직하지만 꾸준해야 합니다. 인성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인간이 덜 된 ‘높은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유배 생활 초기에 우울해하던 다산을 다시 학문의 길로 이끈 이는 강진 주막집 할머니였습니다. 다산이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붙인 곳이죠. 과거가 아닌 사람을 위한 공부를 하게 됐다고 합니다. 남녀평등에도 눈을 떴고요.”

우직하지만 꾸준히, 인성 바로 세워야

윤 회장과 함께 강진 명발당(明發堂)을 찾았다. 다산의 외동딸이 혼인을 해서 살았던 곳이다. 유배 중의 다산이 아내 홍씨가 보내온 치마폭을 잘라 시집간 딸에게 그려준 ‘매조도(梅鳥圖)’ 사연이 깃든 곳이다. 이후 후손들이 이사가면서 없어질 뻔한 것을 윤 회장이 2007년 문중을 설득해 사들여 보존할 수 있게 됐다. ‘매조도’에 이런 시구가 있다. ‘이곳에 머물고 깃들어서 네 집안을 편하게 하렴/꽃은 이미 피었으니 토실한 열매가 맺겠네.’ 딸에 대한 다산의 지극한 사랑이 느껴진다.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산을 계속 선양할 겁니다. 일로 생각하면 짜증이 나서 할 수 없겠죠. 다산의 요체는 효제자(孝悌慈) 세 글자에 있습니다. 효도와 우애, 사랑이죠. 풀어 쓰면 이웃에 대한 배려, 나눔과 베품입니다. 그만큼 토실한 열매가 어디 또 있을 수 있을까요.”

다산과 숫자 … 공직 18년, 유배 18년, 제자 18명

다산생가 여유당

다산생가 여유당

강진 유배생활 18년은 다산의 삶을 가르는 변곡점이 됐다. 정치적으로는 불우했지만 학문적으로는 다산학이라는 큰 열매를 맺었다. ‘무강진, 무다산’이라는 말처럼 강진이 없었다면 다산도 없었을지 모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 기간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다산이 빛나는 이유다.

숫자 18은 공교롭게도 다산의 발자취와 많은 부분 중첩된다. 우선 다산의 공직 18년이 그렇다. 다산은 스물둘인 1783년 2월 세자 책봉을 축하해 열린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을 얻었다. 정조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6년 뒤 문과에 합격해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교육 및 연구문신)이란 공식 관직에 올랐다. 천주교도로 몰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간 게 서른아홉인 1800년이다.

다산이 유배를 마치고 생가 여유당(사진)에 돌아온 건 1818년. 만 18년 후인 1836년 2월 22일 그 곳에서 눈을 감았다. 마침 이 날은 다산의 회혼일(回婚日·결혼 60년). 그는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사람을 늙게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라는 회혼시도 남겼다.

다산이 강진에서 함께했던 제자 18명도 있다. 다산은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해 황상·이청 등 제자 18명을 길러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장은 “500여 권에 이르는 다산의 방대한 저술도 제자들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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