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공동체를 향한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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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양은 개인주의적이고, 동양은 공동체적 사회'라는, 통용되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6년여 동안 내가 살아 본 서구사회는 우리보다 훨씬 공동체적 사회였다. 신문기자인 독일인 친구가 살고 있는 도르트문트의 12가구 아파트를 예로 들어 보자. 1층의 2가구는 낙엽과 눈을 치우는 일과 집 앞의 정원을 가꾸는 일을 책임진다. 위의 10가구는 번갈아 1주일씩 계단 청소를 한다. 계단은 항상 왁스로 밀어 반짝거리고, 예쁜 화분과 그림이 있다. 이들은 꼭 여름과 연말에 음식 한 가지씩 가지고 모여 파티를 열고 담소를 즐긴다. 한 달씩 걸리는 바캉스의 경우 서로 열쇠를 맡겨 꽃 화분을 돌본다. 도르트문트에는 돈을 내고 들어가는 볼링장은 없다. 시 정부가 5~6명 이상으로 구성한 시민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매주 일정한 시간에 볼링장을 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발적으로 여가나 문화서클을 조직한 시민들에게는 무료로 사무실을 임대해 주고, 소량의 지원금도 지급한다. 이렇게 지자체는 앞장서서 시민들이 만드는 공동체적 생활을 적극 지원해 주고 있고, 이들은 대체로 1~2개의 소모임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의 와중에서 공동체가 쉽게 와해됐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정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서구의 도시생활에 비해 한국의 도시적 삶은 참으로 가파르고 건조하다. 삭막한 아파트 생활에서 반상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불참자에 대한 벌금을 피하기 위해 참여하고, 반상회의 일차적인 관심은 아파트값 올리는 문제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공동체를 향한 꿈을 거론한다면, 지나치게 이상주의자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대다수가 살아가는 거대도시 안에서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향한 꿈을 잃은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이나 동료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시민 개개인의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방자치단체들의 노력일 것이다. 언론은 5.31 지자체 선거로 뜨겁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은 냉담하다. 지난 15년간 진행된 지자체의 성과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지자체 선거는 전국적인 정당들의 권력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득표 전략을 위한 각축전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지방의 생활정치는 중앙 권력정치의 장으로 변질하고 있다. 또한 진행 중인 지자체 선거운동을 지켜보면 다음의 지자체 정치도 여전히 지역개발 지상주의, 선심행정, 전근대적 연고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24일 지방선거연대가 발표한 공약 분석 결과를 보면, 이번 선거에도 지역 '막개발'계획이 역력히 드러나며, 지역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생활정치에 대한 관심은 적어 보인다. 지자체의 장들이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내실 있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지역마다 요란한 건물들을 지어 놓고, 그 내부를 텅 비워 놓거나 선전물로 채워 놓은 형식주의 정치는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여! 중앙정치에 연연하기보다는 생활정치, 공동체를 향한 꿈을 실현해 줄 후보를 선출합시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