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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방농정」구호 속에 멍 들어가는 농촌진단|"밑지는 농사는 이제 그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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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올해엔 고추 등 힘들여 지은 농산물값이 안정되어 우리 농민들이 발뻗고 갈 수 있게 되었으면 한이 없겠어요.』 「농산물값 안정」-그것은 전국8백만 농민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수입개방의 물결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농산물 앞에 줄곧 푸대접만 받아왔던 농민들이 흘린 땀방울은 흔적도 없이 스러져가야만 하는 농촌의 현 실정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게다가 일관성없는 농정, 잘못된 시책까지 겹쳐 농민들의 어려움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뼈빠지게 농사지어 봤자 헛고생만 하는 결과가 된다는 농민들은 발붙일 곳도 없어 마침내 몸부림의 시위로 터지고 있다.
『농산물값이 조금만 올라도 소비자보호를 내세워 외국농산물을 마구 수입해오는 등 법석을 떠는 정부가 어째서 값이 떨어지면 농민보호는 외면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올해엔 소비자보호에 신경쓰는 만큼 농민보호대책도 과감히 추진하는 농정을 기대해보렵니다.』 농민 이상호씨(34·전남 무안군 현우면 외반리)의 말이 가슴을 찌르며 파고든다.
오직 땅에 목줄을 건 농민들. 그러나 고추파동, 잎담배 수매파동, 무우·배추파동 등…. 대풍 속의 파동 등쌀에 찌들어 온 지가 한 두 해가 아니다.
지난해 12월25일밤. 전남 무안군청 회의실에서 군수주재아래 심야 긴급간부회의가 소집됐다. 의제는 「군청의 임시 이전문제」.
무안군내 고추재배 농민들이 고추 전량수매를 요구하며 군청을 점거한지 14일만의 일이었다.
이날 회의에선 「정상적 업무 수행불가」를 이유로 군청을 농초지도소로 옮긴다는 미증유의 결론이 내려졌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군청의 임시이전결정이 내려진 것은 40년 헌정사에 처음있는 일.
이 사건은 지금까진 밑바닥에서 침묵의 계층으로 여겨졌던 농민들에 의해 비롯됐다는 점에서 민주화시대를 맞아 농민의 요구목청이 실력행사로 치닫는 농정의 심각성을 그대로 반영한 좋은 사례.
무안지방 농민들은 이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13일 동안이나 군청 앞 광장 등에서 농성을 벌였다.
예상외의 대풍을 맞았으나 고춧값이 폭락, 1근 값이 맥주1병값도 채 안되자 농민들은 수매량을 늘려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생산비라도 건지겠다면서 실력행사에 돌입한 것.
무안군관계자는 군청포기라는 극한조치를 내리기 전 농민대표와 공식적인 대화만도 10여 차례나 갖고 설득, 이해시키려 노력을 다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군청이 너무 무성의했고 심지어 공권력을 동원하기 위해 군청을 포기하는 묘수를 부렸다고 나무라고 있다.
『하다 못해 연말 불우이웃 돕는다는 셈치고 군청직원 등 공직자들이 조금씩 고추를 사달라는 등 애걸하다시피 호소했읍니다.』
무안고추전량수매대책위 최석인 위원장(44)은 사태악화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돌리는 비판에 대해 항변했다.
결국 사태는 농민 2명이 과로와 윤화로 숨지고 주민 4명을 비롯, 군청직원 3명, 전경 3명 등이 충돌로 부상한끝에 강제해산방식에 의해 주동자급 농민 2명이 구속되는 씁쓸한 결과를 낳은 채 14일만에 막을 내렸다.
정부가 고추 추가수매를 발표한 것은 공권력투입에 의한 강제해산작전이 벌어진 구랍 27일.
이 사건은 전남과 경북·전북·충북 등 전국 고추주산지 곳곳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봇물 터지듯 일어나는 농민들의 고추수매량 확대요구시위의 대표격이 됐다.
집단행동을 택하기를 고집한 농민이나,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일선 행정도 문제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을 탈피하지 못한 뒤틀린 농정에 대한 큰 아쉬움을 남겼다.
중공업정책 등에 따른 고도성장 속에 희생계층으로 소외된 채 빚더미에 찌든 농민들이 절박한 상황에 몰린 나머지 농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외치며 생존권적 차원에서 직접행동방식으로 의식을 전환한 것.
『농도전남의 경우 무안사건 말고도 농민들의 시위농성 등 집단행동이 갈수록 빈발, 지난 한 햇 동안만 해도 수세페지·쌀값인상 등을 내건 각종 크고 작은 농민들의 실력행사가 2백여 회나 발생한 실정. 『언제는 고소득 특용작물이라며 장려금까지 주며 고추생산을 격려해놓고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농민만 골탕먹이는 당국을 더 이상 어떻게 믿겠느냐.』 최씨의 반문 속에 농민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음을 읽을 수 있다.
전남대농대 전태갑 교수는 『오늘의 농촌문제는 근대화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돼온 농업정책의 잘못에서 비롯되고 있다』면서 『농초총각이 장가도 못 가는 지경에 이른 농촌사정을 직시, 농업부문도 국제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보호하는 등 도농간 균형성장을 지향하는 정책수립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무안=임광희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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