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의 묘한 동영상 …과학계에 부는 성차별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세계 과학계가 때아닌 여성 차별ㆍ비하 논란으로 뜨겁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성차별 영상물 제작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유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고위 과학자가 여성 차별적 발언을 해 집단항의를 받고 있다. 마침 올해 55년 만에 여성 과학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데다, 지난 5일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여성운동가와 집단 성폭력 종식을 위해 일해온 의사가 선정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리학상 무루, 8년 전 영상 출연 #여성들 핫팬츠 입은 채 춤춰 구설 #CERN 과학자는 "물리학은 남자 것"

지난 2일(현지시간)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프랑스 에콜폴리테크닉의제라드 무루(74) 교수는 과거 출연했던 유럽연구협력단‘ELI’의 홍보 동영상이 문제가 됐다. 문제의 영상은 ‘ELI를 본 적이 있나요?’(Have you seen ELI?)라는 제목의 노래에 맞춰 연구자들이 함께 춤을 추는 내용이 들어있다. 한국 가수 싸이의 대표곡 ‘강남스타일’을 살짝 연상케 하는 코믹한 분위기의 영상이지만, 여성 연구자들이 몸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와 핫팬츠를 입고 등장하는 장면 등이 논란이 됐다. 영상에서 여성 과학자들은 민소매와 핫팬츠 위에 실험실 가운을 입고 무루 교수 등 다른 남성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춤을 추다가 실험실 가운을 벗어 던진다.

 20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아서 애쉬킨과 프랑스의 제라드 무루, 캐나다의 도나 스트릭랜드 교수. 스트릭랜드 교수는 노벨상을 받을 만큼 이미 뛰어난 학자이지만, 소속 워털루대에서는 아직 부교수 신분이다. [EPA=연합뉴스]

20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아서 애쉬킨과 프랑스의 제라드 무루, 캐나다의 도나 스트릭랜드 교수. 스트릭랜드 교수는 노벨상을 받을 만큼 이미 뛰어난 학자이지만, 소속 워털루대에서는 아직 부교수 신분이다. [EPA=연합뉴스]

외신에 따르면 이 영상은 2010년 제작된 것이지만, 무루 교수가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독일의 한 과학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물리학계의 능력남들(The alpha males of physics)’이란 제목으로 영상을 올리면서 갑자기 비판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 기자는 블로그에 “이것은 여성 과학자들이 실제 과학계에서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에 충격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노벨위원회가 이 영상을 봤더라면 무루가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라고 적었다.

갑작스러운 논란에 무루 교수는 5일 성명을 발표하고 “진심으로 마음 깊이 사과한다”면서도“이 영상물은 ELI 프로젝트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과학의 엄격한 이미지를 깨보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말에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8명을 배출한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초청 강연자의 성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피사 대학의 알레산드로 스트루미아 교수는 지난달 28일 CERN 워크숍에서 “물리학은 남자에 의해 발명되고 만들어졌다”고 발언했다. 연구소 측은 즉시“스트루미아 교수의 CERN 관련 모든 활동을 정지한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식지 않았다. 영국 BBC방송은 6일“16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스트루미아 교수의 발안에 대한 비난 성명에 동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초대 소장을 지낸 이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는“과거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한국은 물론, 서구 선진국 세계에서도 여전히 남성 지배적 사고방식이 남아있어. 실력이 뛰어난 여성 과학자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