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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 던져준 불안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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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가영
이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가영 국제외교안보팀 기자

이가영 국제외교안보팀 기자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더 헤이-애덤스에 들렀다. 백악관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대통령 집무실이 내려다보이는 90년 전통의 명소다. 이름에서 은근한 매력을 풍기는 지하 바 ‘오프더레코드’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의 사교 살롱으로 명성이 높다. 이곳은 벽면을 장식한 유명인들의 캐리커처와 캐리커처가 그려진 잔 받침이 명물이다. 받침은 트렌드를 반영해 ‘핫’한 인사들로 채워진다. 이 리스트에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얼굴을 올렸다. ‘밤 베이(폭탄투하실) 진’을 잔에 붓는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 한들 워싱턴은 여전히 그를 불안한 로켓맨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었다.

지난달 말~이달 초 미국은 유엔총회와 이어지는 외교 일정들로 분주했다. 그러나 정작 미 대륙을 뜨겁게 달군 건 북핵 등 대외적 사안이 아닌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였다. 안정적인 삶을 살던 여교수가 사회적 의무를 다하려고 35년 전 성폭행 미수의 증인으로 나섰고 캐버노는 결백을 호소하며 미국이 양쪽으로 쪼개졌다. 마음 한쪽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캐버노와 북한 관련 뉴스를 다루는 미 언론의 온도 차 때문이었다. 지난달 26일 문재인 대통령, 29일 북한 이용호 외무상이 각각 유엔 연설에서 북한 비핵화에 상응하는 조치로 사실상 종전선언을 요구하자 일부 언론이 우려 섞인 보도를 내놨을 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6일 트럼프의 유엔 연설 후 기자회견에서 81분간 나온 44개 질문 중 북한 관련은 단 두 개였다.

트럼프호텔을 지나 인접한 우드로윌슨센터를 지날 땐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3년 전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방미 일정을 동행 취재할 때다. 우드로윌슨에서 한반도 전문가를 상대로 연설한 그는 북핵 문제에 대한 질문에 대비해 해법을 준비했다. 그러나 워싱턴 사람들은 미국·일본·중국 등과 한국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90여 분간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한반도와 북핵으로부터 멀어진 워싱턴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전략적 인내’로 표현됐다. 탈북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북한은 전략적 인내를 핵개발의 면죄부로 간주해 왔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맞닥뜨린 북핵과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에겐 뜨겁지만 미 정가엔 의구심, 언론과 국민들에겐 미미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비핵화 전진이 더디면 평생 사랑을 남발하고 금세 식기를 반복했던 트럼프의 관심도 사그라들 게다. 그렇다면 미국의 분위기가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가진 않을까. 불안감의 끝은 3년 전 그때를 향했다.

이가영 국제외교안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