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과의 깊은 인연을 말하려면 우선 20대 시절의 고뇌부터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1959년 초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같은 학과 동급생들은 상당수가 대학원 진학이나 해외 유학을 꿈꿨다. 하지만 당시 일부가 해외 유학을 떠나 있던 교수진, 빈약한 실험실 등을 볼 때 대학원 진학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해외 유학을 간다 해도 당시에는 앞날이 불투명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 (7554) #<6> 신설 서울대 행정대학원 입학 #미, '미네소타 프로젝트' 한국 대학 원조 #의대·공대·농대 지원에 행정대학원 설립 #선택과목 수학 덕분 이공계로 수석입학 #신문기사 나자 이승만, "미국 유학보내라" #당시 지도층 '과학기술 입국' 의지 보여
그때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서울대 물리학과는 종로구 이화동의 서울대 법대 구내에 있었는데 마침 벽보판에 새로운 안내문이 붙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이 신설되고 1회 입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놀라운 것은 교수진이 미국 대학교수로 이뤄지고 교과과정도 미국의 전문 석사과정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었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미국에 가지 않고도 유학을 떠난 것처럼 공부할 수 있어 보였다.
사실 행정대학원 신설은 6·25전쟁 뒤 미국이 전후복구 원조로 진행한 ‘미네소타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미국은 대외원조를 계속 유지하기 힘들자 효율을 높이고자 한국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원조 방식을 적용했다. 이를 위해 서울대 의대·공대·농대에 장비와 시설을 지원했으며 미국 교수진의 한국 파견과 서울대 교수진의 미국 미네소타대 연수도 진행했다. 이를 통해 한국 대학의 교육·연구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과학기술도 함께 발전했다. 여기에 더해 유능한 행정가를 양성해 정부 효율을 높이고자 과학적인 행정의 선진 기법을 가르칠 행정대학원을 신설하게 됐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막 비상하려던 시기였다.
이런 행정대학원에 물리학도인 내가 간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도 사실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청년 세대는 방법은 달라도 모두가 가난한 한국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꿨는데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행정대학원 입학 자격과 시험 과목을 유심히 살펴봤다. 학부 전공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점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공통시험 과목은 예상대로 국어·영어·역사 등이었는데, 선택 과목에 수학이 들어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물리학을 전공한 나는 수학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격 가능성이 보이기에 응시를 결심하게 됐다.
수학 시험 준비를 위해 서울대 수학과의 최윤식 주임교수가 만든 교과서를 공부했다. 예상대로 그 책에 나온 예제 문제가 그대로 입시 문제로 출제돼 수학은 만점을 받았다. 그 덕분인지 물리학과 출신인 내가 행정대학원 1회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게 됐다. 공통과목의 성적에선 별 차이가 없었겠지만 선택 과목에서 차이가 난 게 아닌가 싶다.
당시 신태환 법대학장 겸 행정대학원장께서 내게 미국인 교수진이 제공하는 수석 장학금을 직접 전달하며 격려했다. 신입생 100명 중 주간 33명은 시험으로, 야간 67명은 현직 공무원 중에서 추천으로 각각 뽑았다.
주간 학생 중 유일하게 이공계 출신인 내가 수석까지 하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한 일간지에서 ‘기술자 천대에 항의한다’ ‘물리학의 신동, 행정대학원에 수석합격’이라는 제목을 달아 사회면 톱기사로 큼직하게 보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이 신문 기사를 읽고 최치환 비서관을 불러 “이 젊은이의 장학금을 주선해 미국에 유학 보내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땅에 행정을 맡을 사람도 필요하지만, 물리학자는 더욱 부족하니 나를 미국에 보내 공부시킨 뒤 나중에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지도층의 ‘과학기술 입국’ 의지는 이런 작은 사례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