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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가혁명 횃불 든 「젊은 양심」의 북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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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경에 도착하던 이튿날 나는 맨 먼저 천안문 광장 그 한복판에 서서 한동안 장승이 되었다.
그것은 그 곳이 중국 천녀사직의 대문이요, 현대 정치가 소용돌이치던 혁명의 중심이요, 민중의 불씨와 선비의 양심이 뜨겁게 불출되었던 문학의 광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광장을 중심 삼아 노폭 1백m의 장안가가 동서로 20km를 넘게 일직횡주하고, 그 광장을 남북으로 고궁이 일렬종대 늘어섰으니 그 곳이 중국의 심장임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무명용사비 우뚝>
거기에 귀를 모으면 그 심장으로부터 피를 뿜는 고동소리가 들렸다.
「징기즈칸」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원나라 제일의 극작가 관한경의 호궁소리가 들렸고, 청나라 건륭 황제의 드높은 기세아래 조점은 그 가세의 몰락과 함께 자전적인 소설 『홍누몽』을 쓰면서 표박하던 곳도 모두 여기였다.
그들의 슬픈 그림자가 보이는가 하면 여기 천안문 광장에는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1900년 양병과 제국주의를 막았던 의화단이 여기서 봉기한 뒤 1919년 오사운동, 1926년의 일이애국학생운동, 1947년의 오이십내전 시위 등은 물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곳, 1976년 4월 5일 백만의 혁명군중에 의해 4인방 추방시위가 폭발되었던 곳도 모두 여기였다.
오사운동이 비록 「주권보호」 「청도수복」 「파리강화철폐」 등 국내외 정치를 문제화한 것이었지만 채원배·진독수·호적·이대쇠 등에 의한 신문화 운동이나 문학혁명으로 발전되었고 「사오청명」시위가 비록 주은내 추도나 4인방 타도의 정치명제였지만 거기에 모인 학생·군인·노동자의 분노를 터뜨린 것은 거기 영웅탑 탑좌에 붙여진 진솔한 시가였듯이 중국의 현대사는 줄곧 정치혁명이 문학혁명을 주도하거나 문학혁명이 정치혁명을 진작시키는 그러한 구조를 보였다.
천안문 광장에는 매서운 북풍이 휘몰아쳤다. 북풍은 거기 첩첩이 쌓인 그림자와 함성들을 씻느라 피리 소릴 내었다. 북으로 우러러보면 휘황한 고궁들의 장관, 나는 차라리 남쪽으로 가물가물한 그 잿빛 광장에 푹 안기기로 했다.
거기엔 천안문 시가혁명의 현장이 있었다. 그 현장이란백년동안의 현대사에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 용사를 기리는 「인민영웅기념비」였다.
38m의 높이로 우뚝 선 영웅담은 남쪽의 모택동 기념관과 북쪽의 천안문, 그 일직선에 놓였었다. 3천평방m에 달하는 탑좌, 그 동서남북의 벽면이 곧 「시낭」, 시가 붙었던 복도가 되었고, 그도 모자라 영웅탑 남단엔 그물처럼 새끼를 치고 거기에 수천 수만장의 백지에 시가 펄럭였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청명절, 주은내에게 바치는 꽃바구니가 물결쳤고 4인방 타도를 외치는 시들이 하루아침에 광장을 덮었으니 청명시는 곧 문화혁명의 몰락을 예고하는 천둥 같은 예시였다.
천안문 시가혁명은 문학이 정치를 예시하는 그 첫 장거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1978년 겨울, 북경엔 『사오논단』『금천』등을 비롯한 지하문학지가 46종이나 발간되었는데 처벌과 감금 심지어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이들 문학지의 정신은 중국에 문학이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비판이요 저항이었다.
그들의 기본 자세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불신하고 부정하는데서 시작했다.

<"시로 구국" 확신>
심지어 「베이따오」(북도)의 『대답』이란 시에서처럼 하늘이 쪽빛이란 명명백백한 사실조차 믿지 않는다고 저항했던 것이다.
그때 북경의 지하 문단에서 얼굴을 감추고 폭탄 같은 시를 썼던 「베이따오」(북도)·「망커」(망극)·「양롄」(양연)·「쟝허」(강하)·「꾸청」(고성) 같은 신진 시인들은 오늘날 그 전신을 공개했을 뿐 아니라 중국문단의 신시기를 펼치는 주력군이 되었었다.
그들은 중앙당과 중앙정부의 소재지에서 암흑을 쫓고 절망을 부수며 민주화 자유를 포옹했고 밝고 풍요로운 조국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그만큼 시로써 나라를 구한다는 확실한 신념에 불타고 있었다.
지금 북경의 선무구 우안문 서단엔 1천여평의 땅에『홍루몽』의 무대가 되는 청나라 망족 가연과 가원의 저택경비원인 대관원을 건축하여 18세기초를 재생시켰고, 고궁 서쪽 전해의 언덕엔 곽말고이 살던 집을, 고궁의 동쪽 동성근황남가엔 노사가 살던 집을, 전해의 동쪽 남나고항엔 모순이 살던 집을 각각 기념관으로 전용함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남기고 그 유적을 관광에 제공함으로써 문학기항의 자원을 늘리고 있다.
나는 그러한 문단의 별보다 시민 속에 얼굴을 감추고 청명시가혁명에 가담했던 무명시인이나 지하문학지에 투고했던 작가들, 그들의 절실한 비평이나 저항이 훨씬 소중했다. 획일주의의 사회주의문학 풍토에서 말이다.
나는 지난해 10월 31일, 북경대학 중문과가 주최한 나의 공개강연 「중국대륙과 대만의 현대시 비교」를 통해서 그 두 집단의 문학성과 문학적 의의를 부각하면서 예술적인 차원으로 볼 때 대륙의 현대시가 대만의 것에 미치지 못함을 지적했는데 1980년 중국에서 최초로 중국 현대시의 현대화와 예술화, 그리고 탈 정치와 탈 공식을 주장했던 사면(북경대 교수)은 나의 견해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비판 폭넓게 수용>
여기서도 그들의 비평을 수용하는 객관적인 금도나 대륙적인 국량을 살필 수 있었다. 보다 놀란 것은 자기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과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국우시의 의식이 세차게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동안 북경의 화제를 모았다가 최근엔 재방영은 물론 그 비디오 판매조차 금지된 텔레비전 대하시리즈인 『하상』을 두고 말한다.
북경방송대학 신문과 교수로 르포작가인 소효강(1949∼)과 북경사범대학 중문과 교수인 왕노상(1956∼)의 공저 시나리오로 역사학적·지리학적·정치학적·미래학적인 다각도의 조명을 곁들여 지난해 6월, 6회에 걸쳐 방영된 바 있는 『하상』은 중국민족의 반성을 촉구하고 미래를 겨냥하는 미증유의 기획이었다.
제작상 시간적·공간적 질서나 구도를 타파한 채 현실적인 실사구시의 의의에다 역사적인 고찰을 병행하여 그 동안 관광명소를 순례할 때 으례 강조되던 국토예찬·역사숭배·조상숭배 등을 배제하였다. 그러니까 단순한 황하의 순례나 해설이 아니라, 황하라는 중국민족의 숙명을 비판적으로 해부하였다.
전체적으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황토·황하·황인에 이르기까지 온통 누런 색감 속에서 그것을 숙명시했는데 전6집을 통한 패러독스는 마치황사처럼 시야를 흐리게 했다.
제1집인 「꿈을 찾아서」에선 전통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던 용을 풍자했는데 이제까지 용은 자연계의 폭군으로 인간세계의 폭군인 황제로 군림했음을 지적하곤, 용은 비록 중국인에게 세계문명사상 가장 오랜 역사적 긍지를 주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행동을 둔화시킨 부담을 주었고, 심지어 근대의 빈곤과 낙후를 감추려는 비겁이라고 힐난하였다.
제2집인 「운명」에선 중국의 위대한 건축으로 그 상징이 되었던 만리장성을 풍자했는데, 그것은 영광과 부강이 아니라 단절이나 폐쇄라고 힐난하면서 중화민족의 개조인 황제는 황토의 화신이요, 중국민족이 대대로 흙 속에 목숨을 바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했다.

<민족반성도 촉구>
제3집인 「영광」에선 고고학상 중국은 서북쪽 황하의 황토지대에서 기원한 황제문화를 정통시할지언정 동남쪽 비옥한 평원에서 생장한 염제문화를 부수시함에 의문을 제기했고, 제4집인 「신기항」에선 몇천년을 두고 절대 빈곤을 누더기처럼 입었던 황하의 악조건을 투시하면서 지금 새로운 각성이 황하로부터 양자강으로, 양자강에서 다시 황해와 동남해안으로 복사발전하고 있다고 내다보았다.
제5집인 「우환」에선 먼저 중국 발전의 한계로 황하를, 황하는 다시 홍수·토사·가뭄 등의 천재를 날라 왔다고 지적했는데 황하는 천재 말고도 관료주의·특권주의·부정부패 등 인재를 동반하고 있음을 그 최대의 우환으로 보았다.
제6집인 「녹색」에선 사람의 피나 원시종교가 경배하는 색깔이 붉은데 반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빛깔은 녹색이라 전제하고, 지금 중국에 있어 유가적인 내륙문화가 황색이라면 세계주의적인 해양문화를 녹색으로 단정하면서 지금 황하는 험난한 역사와 참혹한 가난을 뚫고 바야흐로 검푸른 황해로 흐른다고 했다.
그 마지막은 사회주의문학답게 광명화를 시사했다. 그러나 그 시리즈를 통해 노출시킨 고난의 현장이 민족자존을 훼손하고 체제를 모욕했다는 여론에 밀려 비판을 받았고 비디오는 몽땅 판금 당했다.
이 일련의 민족반성을 촉구하는 애국문학이 젊은 양심들에 의해 민중 속에 자생함으로써 북경을 중국문학의 중심으로 굳히는데 기여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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