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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영국과 미국의 문화적 유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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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물론 이들 앵글로색슨 형제국들 사이에도 전통과 문화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 각지의 이민자들을 수용하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해온 미국은 오늘의 영국과는 다른 문화와 전통을 키워왔다. 황무지에서 개척시대를 열어간 미국인들은 도전적이고 창의적이다. 신분 차별을 피해 이민한 사람이 많은 만큼, 출신에 대한 집착이 없고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일어설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통과 인식이 확고하다.

이에 비해 줄곧 전통사회에서 살아온 영국인들은 보수적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경험주의의 전통이 강하지만, 늘 찌푸린 날씨 탓인지 매사에 신중하고 성급하게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적다. 또 사람마다 조직이나 사회에서 늘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처신을 해 나간다.

이 같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미국을 가장 잘 이해하는 나라를 꼽으라면 당연히 영국이다. 확실히 영국에는 미국을 체질적으로 가깝게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영국 TV를 보면 대중매체에서 미국 문화를 소개하고 즐기는 일은 정작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 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최첨단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에서는 미국에서는 유행이 지난 뮤지컬들이 인기다. 존 트래볼타와 올리비아 뉴턴 존이 열연한 그리스나, 사운드 오브 뮤직, 메리 포핀스 같은 뮤지컬들은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에 연례행사처럼 방영된다. 여행 대상지로도 뉴욕.마이애미.샌프란시스코 등의 미국 내 관광지들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국에는 50여 개 대학이 미국학 전공을 설치해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학 등 다양한 과목마다 영.미 양국을 비교하며 가르치는 수업이 많다. 최근 이라크전 과정에서 영국 언론에서 혐미(嫌美)주의가 선정적 유행을 타는 가운데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받쳐주는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미국 문화에 대한 친밀감이 아닌가 한다.

미국에서도 형편이 괜찮은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1년간 교환학생으로 영국 대학에 유학시키는 것이 대단한 인기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내 유력 인사들이 젊은 시절 다녀간 옥스퍼드대의 로즈 스칼라 제도는 이들 교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셈이다.

미국 대학들은 특히 세계 전략을 입안하면서 대영제국의 경험을 배우려 하고 있다. 예일.하버드 두 대학이 영국 출신 역사학자 두 사람을 '수입'해 간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1980년대 한창 군사력 과다 지출로 미국 하강론이 등장했을 때 예일대는 '대국의 흥망'이란 저서로 베스트셀러 교수가 된 폴 케네디 교수를 채용했다. 최근에는 '유일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 부심하던 하버드대가 한창 대영제국 연구로 성가를 올려온 옥스퍼드대의 니알 퍼거슨 교수를 스카우트했다. 대학뿐 아니라 런던과 워싱턴의 싱크탱크들 사이에서도 각종 교류가 다차원에서 이뤄지고 있고, 각종 학술서나 대중서적도 상당수가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에 출간되고 있다. 도버해협 건너 프랑스의 경계심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영.미 양국 간의 문화적 특수관계가 뗄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 있다.

최근 한류 문화가 아시아 전역에서 일대 현상이라 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발원하는 아시아 대중문화의 공통성이 상호 경계심과 오해의 골이 깊은 아시아 지역에서 이해와 협력을 넓혀가는 기초가 될 수도 있음을 영.미 양국의 문화적 특수관계는 보여주고 있다.

김승영 영국 애버딘대·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