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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하는 게 많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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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호 20면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88> ‘배달의 민족’이 만든 효자손

사랑의 감정은 억누르지 못한다.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는 이도 보지 못했다. 근지러움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살면서 닥치게 되는 대책 없는 경우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다. 재주 있는 이들이야 자주 겪겠지만,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 하니 상시 반복되는 일은 없다. 문제는 나머지 둘, 재채기와 근지러움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재채기는 하면 그만이다. 손닿지 않는 부위의 가려움은 어떻게 해결할까. 책장 모서리나 테이블에 등짝을 비벼대며 몸부림 칠 게 뻔하다. 나름의 대처는 시원치 않다. 등은 비벼댈수록 더욱 근지럽다. 시원하게 등 긁어 줄 사람이 절실할 게다. 정작 필요할 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겪어봐서 안다. 쓸 만한 등긁개를 떠올려보지만, 그조차 옆에 있는 경우도 드물다. 소박한 기대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손에는 쥐는 맛, 등에는 긁는 맛  

엉뚱한 상상력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등긁개가 배달의 민족(이하 배민)에서 나왔다. 이름이 길다. ‘효자손 혼자서도 잘해요’다. 이 물건의 실물을 처음 본 순간 혼자서 웃었다. 효자손은 누구의 도움 없이 제 손으로 손닿지 않는 등을 긁는 물건 아니던가. 새삼 ‘혼자서도 잘해요’란 문구를 박아 넣어 친절하게도 용법까지 일러준다. 누가 그걸 모르나, 당연하게 아는 내용을 당당하게 강조하는 키치의 능청스러움에 당한 거다.

다음엔 효자손이 버젓한 상품으로 기획됐다는 점에 놀랐다. 누구에게나 절실한 물건이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다. 물건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예리한 촉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요구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또 뭔가. 너무 하찮고 드러내놓고 말하기 민망해서 서로 빗겨버린 관심의 공백이다. 등 긁개는 냄새 나는 할배, 할매들이나 쓰는 칙칙한 전유물로 기피 물건 취급한 것은 아닐까. 효자손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던 속내는 늙음의 부정적 의미와 선입견을 넘지 못한 거부감이었던 거다.

배민은 남들이 드러내놓지 않는 관심을 번듯한 상품으로 바꾸어버렸다. 흰색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진 효자손은 산뜻하고 날렵했다. 얼핏 보면 자와 같다. 대나무를 휘어 만든 조악한 형태의 기존 등긁개를 떠올린다면 디자인의 파격을 수긍하게 된다. 색채마저 지워버린 흰색의 깔끔함은 마치 스티브 잡스 시절의 애플 제품을 보는 듯하다. 잡스가 효자손을 만든다 해도 이보다 더 잘 만들 것 같지 않다.

몸체는 손에 쥘 때 최적의 그립감을 느끼도록 너비는 26mm, 두께는 5mm, 길이는 455mm로 날렵하게 만들었다. 더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다. 등에 닿아 시원하게 긁어지는 기분을 줘야한다. 다섯 개의 홈이 파진 갈퀴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각도로 설계됐다. 믿거나 말거나 64.5도 각도가 연구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는 데, 구부려진 부분의 처리가 정교하다.

직접 등을 긁어봐야 확인할 수 있다. 뭉툭한 대나무 갈퀴가 닿는 느낌과 다르다. 엣지가 선 각도의 효과를 시원함으로 보상한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날카롭지는 않다. 얇아진 손잡이와 플라스틱의 탄성으로 휘어져 압력의 조절이 쉽게 된다. 재질과 형태의 개선에 몸이 반응한다는 걸 알겠다.

사용 설명서가 예술이다. “손에 닿지 않는 부위의 가려움에서 온전한 해방감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비장한 선언이 나온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쉽고 편하게 쓰도록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된다. 등긁개 하나에 이토록 거창한 이유를 붙일 수 있다는 반전의 유머는 즐겁고 유쾌하다. 효자손을 쓰면 가려움의 해소와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물론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나.

사용법 안내도 재미있다. 오래 쓰면 손에 익어 더 잘할 수 있다거나 잘 조준하고 속 시원하게 긁으라는 얘기도 있다. 사용 후 잘 걸어두라는 친절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부작용의 위험 경고도 잊지 않았다. 있다 없으면 허전하다는 둥 상습적으로 써도 가렵다면 병원에 가라는 조언도 담았다.

강약조절 시스템 편은 배꼽을 잡게 한다. “최첨단 인간지능 기술로 3단계 강약조절이 가능하다” 했다. 약은 살살, 중은 적당히, 강은 세게 긁으라는 거다. 뻔한 이야기를 정색하며 풀어놓은 넉살이 밉지 않다. 하긴 사람 손으로 긁는 것이니 그보다 더 정교한 조절은 불가능할 터다.

마지막엔 효자손의 101가지 활용법이 수록되어있다. 침대 밑에 들어간 스마트 폰을 꺼내라거나, 거미줄 제거, 호신용 막대기, 고양이 장난감에 이르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적용할 수 있는 일상의 용법까지 담겨있다. 도톰한 두께의 작은 책으로 묶여있는 사용 설명서를 보며 킥킥거리며 웃는 재미가 쏠쏠하다. 6개국 언어로 세계의 사용자를 겨냥한 점도 돋보인다. 같은 이야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재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느슨하고 헐렁하게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정색하고 풀어놓는 배민의 입담이 흥미롭다.

용법을 몰라도 쓸 수 있는 효자손으로 책 속의 내용을 따라 해봤다. 당연한 데 재미있다. 강약조절 시스템엔 인공지능이 작동되는 듯 했다. 혼자서 이리저리 긁어보니 사람이 긁어주는 것에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자손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효과와 용도도 달라지는 듯했다. 엉뚱한 처방도 효과를 내는 플라시보 효과는 약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배민’의 고정관념 비틀기 쉽게, 명확하게, 위트있게  

제품을 담은 포장 박스는 거창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흰색으로 깔끔하게 디자인 된 박스엔 뭔가 대단한 물건이 들어있는 듯한 기대를 불러 일으킨다.

뚜껑에 박아넣은 ‘혼자서도 잘해요’ 서체가 이상하다. 삐뚤빼뚤한 초등학생 글씨 같은 획의 비례와 엉성하게 삐져나온 양성 모음은 뭔가 어색하다. ‘배민체’라 부르는 독자적 서체다. 반듯한 한글 서체 대신 아마추어 인턴직원의 솜씨로 만들었다고 했다. 일부러 모자라는 듯한 부분을 다듬지 않고 쓰는 뱃심이 대단하다. 어쨌든 배민체로 쓰인 문구에서 ‘배민다움’이 저절로 다가온다.

하는 일마다 화제를 일으키며 승승장구하는 ‘배달의 민족’이다. 국내 제 1위의 배달 앱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져 최근엔 반찬가게와 문구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창의적 사고와 실천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이룬 성과다.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고정된 시선을 뒤집는 데 주력하는 인상이다.

배민이 만든 광고와 물건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다 때가 있다’란 문구가 쓰인 때 수건, ‘경희야 넌 먹을 때가 제일 예뻐’ ‘음식을 많이 먹으려면 많이 사야 하듯이 책을 많이 읽으려면 먼저 많이 사야한다’ ‘십육기가 USB’ ‘휴가에는 사유가 없습니다’ ‘차는 영어로 카레’ . 배민의 광고 문구는 잊을 수가 없다.  


쉽고 명확하고 위트 있게! 이 세 마디로 압축되는 배민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은 듯하다. 2년 전 배민의 김봉진 대표를 인터뷰한 홍성태 교수의 책 『배민다움』을 다시 읽었다. 쉽고 명확하고 위트 있는 말과 상품이 거저 나오는 게 아님을 알았다. 쉬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공부하며 무거워지지 않는 삶의 태도가 바탕이다. 남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펼쳐놓은 실험을 우리는 계속 지켜봐야한다.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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