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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을 위하여 이근배(시조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여기 굽이치는 산봉우리와 봉우리
저기 끓어오르는 물보라와 빛줄기들
이 하늘과 땅에 비로소 목숨을 얹혀주는
크고 밝은 태양이 뜨고 있다.
이나라 5천년의 감춰진 눈물을 씻고
한민족 가슴마다 이끼낀 어둠을 걷고
1989년이 밝아온다
우리 모두 산으로 가자
백두나 한라나 설악이나 지리나
그 영봉에 올라 해돋이를 보자
오늘의 역사는 어제의 허물을 벗고 태어났듯이
지금 떠오르는 태양도
지난 어둠의 태줄을 끊고 솟아나는 것
우리 목청을 열자
어머니가 물려준 젖과 피가 마르도록 내 나라의 아침을 노래 부르자
산과 산, 물과 물, 구름과 구름, 바람과 바람, 꽃과 꽃, 새와 새, 나무와 나무들이 일어서서
모두 합창하게 노래 부르자
어디서 눈보라가 오느냐
비바람이 몰아오는 숨소리가 들리느냐
설령 우리의 앞에 안개가 서려도
이제 저 하늘의 빛은 가릴 수 없거니
가난에 허리를 조르고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살아온
이 억세고 끈질긴 핏줄은 짓누를 수 없거니
눈 부릅뜨고 바라보는 약속된 내일이 있거니
겨레여
우리 햇빛속에 따사롭게 손을 잡는
산이듯 물이듯 나무들이듯
이제는 한데 모여 사랑을 나누자
설움도 아픔도 떠가는 구름이듯 흘려보내고
6천만 한 덩어리로 밭갈고 김매고 곡식을 거두자
압록강과 한강이 서로 만나고 대동강과 낙동강이 이야기하는
1989년의 시간의 꽃밭에서
우리는 자유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자유로우며
평화라는 말을 모르나 평화를 지키며
정의를 외치지 않으나 정의롭게 사는
아니 찢기고, 피흘리고, 짓밟히고, 억울한
그런 낱말들은 까맣게 잊고 사는
새날의 꿈을 가꿔야 한다
오, 오
아침의 나라에 넘치는 빛이여
빛을 먹고 사는 한민족의 거룩함이여
마침내 통일의 날개를 치고
금빛 목청으로 울음우는 산하여
우리 아들 딸들의 복된 보금자리여
영원하랴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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