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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선녀 옷 훔쳐 결혼한 노총각, 좋은 사람 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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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 (16)

명절이 괴로운 이유는 화합의 마당이 되어야 할 공간에서 걱정을 가장한 공격과 힐난의 말이 오가는 것 때문이 아닐까. [사진 pixabay]

명절이 괴로운 이유는 화합의 마당이 되어야 할 공간에서 걱정을 가장한 공격과 힐난의 말이 오가는 것 때문이 아닐까. [사진 pixabay]

괴로운 명절이 다가온다. 평소에 자주 보지 못했던 친척들이 한데 모이고,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울려 밥을 먹고 성묘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절대 화합의 마당이 되어야 할 명절이다.

그러나 각자 바쁜 일에, 자기 식구들만 따로 사는 가족의 형태로 인해 일단 모이는 것부터가 힘들다. 어렵게 모인 그 화합의 마당에서 펼쳐지는 대화 속에 걱정을 가장한 공격과 힐난의 말이 오고 갈 것이 뻔하다. 그 풍파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 화합도 필요 없고 그저 홀로 조용히 TV나 보면서 지냈으면 싶은 명절 연휴다.

명절 때 가장 듣기 싫은 사람의 ‘정해진 길’ 

너무나 확고하게 뿌리박혀 있어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의 일생이다. ‘이렇게 살아야 해’ 하고 교과서처럼 정해져 있는 길 말이다. 초중고 교육도 순차적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대학도 당연히 가야 하고, 대학 나오면 당연히 멀쩡한 기업에 취직해야 하고, 취직해서 벌이도 안정되면 당연히 결혼해야 하고,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아이도 낳고 가정을 이루었으면 이제 집을 조금씩 늘려갈 차례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너무도 당연하게 재테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고, 그러면서 잘 나이 먹어 가는 것이 정해진 길이다.

명절 때 가장 듣기 힘든 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정해진 길’과 관련한 것일 테다. 그중에서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 옛이야기에서 흔한 도입부가 ‘나이 삼사십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간 가난한 노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찼음에도 장가를 못 간 데에는 가난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만, 가난보다도 ‘나이가 차도록 장가도 못 간’ 것이 일생일대의 문제 상황이 된다.

명절 때 가장 듣기 힘든 말 중 하나는 교과서처럼 정해져 있는 '정해진 길'과 관련한 것이다. [사진 pixabay]

명절 때 가장 듣기 힘든 말 중 하나는 교과서처럼 정해져 있는 '정해진 길'과 관련한 것이다. [사진 pixabay]

그런 문제 상황에 처해 있는 대표적인 인물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대부분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을 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과는 같은 듯 다른 이야기 한 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에 나이 사십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장가를 갈 수 있으려나 싶어, 용하다고 소문 난 소강절이라는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자기 말대로만 하면 될 것이라며 어느 강에 가면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을 것인데 여인이 벗어놓은 옷을 훔쳐 가지고 있으면 수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소강절이 시킨 대로 했고, 목욕을 끝낸 여인이 옷을 찾다가 남자의 집에까지 이르러 끝내 남자에게 붙들려 살게 되었다.

목욕 중에 옷 훔친 노총각과 살게 된 용왕의 딸 

아이 삼 형제를 낳고 잘살던 어느 날, 여인은 자기 옷을 달라고 했다. 남자는 ‘이제 와 어쩌랴’ 하는 마음에 별 의심 없이 옷을 내주고는 밭일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아이들만 보채고 있고 여인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에 나가 배회하다가 강물에서 솟아 나오는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자신은 동해 용왕의 딸인데 죄를 지어 강에 나왔다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이라며 이제 자기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파란 병, 빨간 병을 주면서, 파란 병은 젖먹이들에게 먹이고, 빨간 병은 소강절 선생에게 갖다 주라고 하더니 도로 물속으로 들어가 영영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용왕의 딸은 나무꾼과 보낸 억울한 세월이 소강절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에게 함부로 천기를 누설한 소강절에게 벌을 내렸다. 선녀와 나무꾼의 노루에게 관심이 없는 선녀와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사진 pixabay]

용왕의 딸은 나무꾼과 보낸 억울한 세월이 소강절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에게 함부로 천기를 누설한 소강절에게 벌을 내렸다. 선녀와 나무꾼의 노루에게 관심이 없는 선녀와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사진 pixabay]

남자가 빨간 병을 소강절에게 갖다 주어 소강절이 병마개를 확 따니까 불이 번쩍 나더니 소강절의 방에 있던 술서(術書)를 전부 다 태워 버렸다.

동해 용왕의 딸이라 이 정도 조화를 부릴 줄 아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물속에 있어야 할 인간이 아닌 존재가 어쩌다 인간의 눈에 띄어 아이를 낳으며 몇 년을 살았으니 억울할 만도 하겠다.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선녀와 나무꾼’에서도 날개옷을 받자마자 선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버린다.

선녀에게 지상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기회 될 때마다 날개옷을 꺼내 달라고 조른 것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용왕의 딸은 선녀와 좀 다르다. 선녀는 노루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반면, 용왕의 딸은 나무꾼과 보낸 억울한 세월이 소강절 탓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천기를 누설한 소강절을 벌한다. 동해 용왕의 딸이 한갓 점술서로 천기누설이나 하는 점쟁이보다는 급수가 높다.

‘억지 인연 맺기’는 처벌감 

소강절이 벌을 받게 된 것은 인간이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를 이용해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쪽의 일방적 의사만을 반영한 인연 맺기를 시도한 것이었기에 이에 대한 징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요새야 원하지 않는 결혼을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이 적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시도는 무수하다고 할 수 있다.

적당히 혼기에 이른 선남선녀에게는 여기저기에서, 특히 집안 어른들이 어디에 나이 몇 살짜리 처녀 혹은 총각이 있다고 들이밀기 일쑤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 나이나 사는 곳 정도의 정보만 있을 뿐 정작 당사자가 궁금해할 만한 성격이나 가치관, 하는 일의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당사자가 이성을 만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주변에서는 억지로 인연을 만들어 주려는 시도가 무수하다. 이에 무수한 청춘이 상처를 받는다. 짝 없이 혼자 있는 데에는 이유와 상황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짝이 있어야 함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진 pixabay]

우리 주변에서는 억지로 인연을 만들어 주려는 시도가 무수하다. 이에 무수한 청춘이 상처를 받는다. 짝 없이 혼자 있는 데에는 이유와 상황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짝이 있어야 함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진 pixabay]

또래끼리도 짝없이 홀로 있는 친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소개팅해볼래? 넌 왜 소개팅도 안 해? 그냥 그렇게 있으면 어디 가서 남자(여자)나 만나겠니? 부지런히 노력해 봐. 어디 동호회라도 가입하든가.” 어쩌고 어쩌고 하는 수많은 찔러댐에 무수한 청춘이 상처를 받는다. 소강절과 다를 바가 없다. 짝없이 혼자 있는 데에는 백만 가지 이유와 상황이 있을 수 있으나 그런 것 다 무시당하고 무작정 짝은 있고 봐야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만남 자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만나보라고 떠밀어대는 그 상대가 별로 탐탁지 않을 수 있다. 억지로 인연을 맺어주려 애쓰다 소강절처럼 당하는 수가 있을 것이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초빙교수 irhet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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