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에 정치생명 걸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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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치변혁의 첫해를 보내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회는 용케도 이만큼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다. 그것은 만족감과는 다른 것이다. 아슬아슬했던 여러 고비를 그런 대로 잘 넘기고 이제 탈 독재·민주화 과업이 일단 돌이킬 수 없는 단계를 넘겼다는 확신과 함께 변혁의 둘째 해도 또 그런 곡예를 반복해야하나 하는 불안이 도사린 안도감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혁명이 단칼에 옛 권력자들을 제거해 버리고 세상을 그야말로 거꾸로 뒤집어엎는 변혁인데 비해 개혁은 그 성격상 개혁세력과 구세력이 같이 공존하는 가운데 이루는 변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수긍한다면 6공 속에 5공 때 인사들이 들어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가 5공의 산물이 아닌가. 다만 문제는 구체제의 인물들이 품고있는 개혁의 의지가 얼마만큼 절실하냐는 점이다.
그와 같은 개혁의 성격 때문에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확신과 능력을 가진 개혁 주도세력이 있어야하고 그 확신은 개혁의 성공만이 그 세력의 정치생명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자각에서 우러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모범적 예를 스페인의 탈 「프랑코」개혁과정에서 보았다. 스페인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프랑코」자신이 후계자로 키웠던 「카를로스」왕과 「프랑코」 체제 안에서 청년부 장관까지 지낸 「수아레스」 수상이었다.
이들은 「프랑코」 사후에도 계속 권력의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 한 「참호파」(참호를 파고라도 최후까지 수구하려한 태도에서 나온 이름)들을 물리치고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자파와 군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합법화시키고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활동으로부터 격심한 노조운동에 이르기까지 탈 독재 작업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로 인내했다.
그 길만이 입헌군주제의 틀을 지키고 「프랑코」파의 잔존세력을 정치세력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국왕도, 수상도 자각했던 것이다. 그런 확고한 개혁 의지는 위기가 올 때마다 위기를 돌파하는 힘이 되었고, 위기가 개혁을 한 걸음씩 전진하는 방향으로 마무리짓게 했다. 그런 의지의 순수성은 결국 국민들을 납득시켜 첫 선거에서 「프랑코」파 개혁 주도세력에 압도적 승리를 거두게 해주었다.
81년 「테헤로」 소령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의회를 점거하고 의원들의 머리위로 기관단총을 쏘며 위협했을 때 스페인의 민주화는 사활의 고비를 맞았다. 이때 「카를로스」국왕은 『쿠데타를 성사시키려거든 나부터 죽이라』는 최후 통첩을 가지고 밤새도록 일선 지휘관들을 회유했다. 그 단호한 태도 앞에서 스페인 군대는 쿠데타 동참 호소를 거부하고 민주화 지지로의 선택을 하게된 것이다. 스페인의 민주화는 위기를 겪음으로 해서 오히려 확고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해를 보내면서 느끼는 안도감의 뒤에는 개혁을 주도해야할 입장의 정부·여당이나 이 작업에 공동책임을 지고있는 세 야당이 앞으로 닥쳐올 개혁의 시련 앞에서 올해보다 더 확고한 의지와 인내를 발휘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걱정은 올해 추진되어온 민주화 개혁 작업이 정치인들의 확고한 사명감이나 구체적 청사진 없이 대세에 밀리면서 추진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전씨 문제 처리가 마지막 단계에서 보인 흥정의 인상이나 5공 비리 및 광주청문회에서 보인 여당의원들의 태도는 이들이 「참호파」인가 진정한 개혁파인가를 단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민주화로의 개혁 추진력은 정치세력들보다는 청문회가 불러일으킨 국민의 여론에서 주로 나왔다는 점을 정치인들은 깊이 음미해야 될 것이다.
특히 정부·여당은 이런 어정쩡한 자세를 속히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모든 전조로 보아 새해는 올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개혁의 과제들이 제기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의 과제가 5공의 청산에 집중된 것이었다면 새해의 과제는 민주화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하고 민주화를 민생의 문제에 연결시키는 과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개혁작업이 더 이상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권력과 부의 재조정문제가 제기되고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 더 격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많다. 집단 간에 구체적 이해관계를 놓고 충돌할 때 그 양상은 지금까지와 같은 학생시위보다 더 험악해 질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전망을 놓고 우리 사회가 그 정도의 갈등은 포용할 수 있는 저력을 가졌다고 낙관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저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개혁작업을 주도할 입장에 있는 정치권의 자세가 올해 5공 비리 청산과정에서 보인 것과 같은 소극적인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적은 과거의 타성대로 누적되어 있는 사회갈등의 표출을 단순한 보수·혁신의 대결이나 심지어 좌·우익의 사상대결 내지 체제 전복의 위협이라는 도식적 대응의 유혹에 빠지는 일이다.
그런 측면이 일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 억제되어온 사회갈등의 대부분은 체제 안에서 수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아직은 보·혁 간의 양자택일의 외길로는 들어선 단계가 아닌 것 같다.
정치권의 개혁작업은 이 갈등이 그런 위험한 단계로 접어들기 전에 이를 수용하고 해소하는 데 선도역할을 얼마만큼 신속하고 신빙성 있게 해내느냐는 것으로 평가되게 되어있다.
새해에는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확고한 개혁의지와 행동을 통해서 정치권으로부터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장두성·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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