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베트남 팬들, 피자·캔맥주·옥수수 건네며 환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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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축구대표팀 감독이 두손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임현동 기자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축구대표팀 감독이 두손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임현동 기자

“1월 중국에서 열린 23세 이하 아시아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갔어요. 뚜껑 없는 버스에 선수들과 함께 타고 카 퍼레이드를 하는데 가는 곳마다 축구팬들로 인산인해야. 5시간 넘게 도로 위에 있다보니까 허기가 지더라고요. ‘배가 고프네’하고 툭 내뱉었는데 함께 있던 선수들이 알아들었나봐요. 팬들에게 뭔가 한 마디 했는데, 그 즉시 우리가 탄 버스 위로 온갖 음식물이 날아드는 거에요. 피자, 치킨, 햄버거, 캔맥주에 심지어 삶은 옥수수가 담긴 비닐 봉지도 있더라고. 감기 몸살 때문에 기진맥진했는데,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게 나에 대한 베트남식 애정 표현이구나’ 싶었죠.”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배고프네’ 혼잣말에 음식 쏟아져 #현지인 애정 표현에 정신이 번쩍 #말 대신 선수들 발마사지로 소통 #한국·베트남 더 가깝게 하고 싶어

8개월 전 겪은 일을 떠올리는 박항서(59)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7일 서울 신촌에서 박항서 감독을 만나 ‘박항서 리더십’이 뭔지 물어봤다. 박 감독은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 한 것 뿐인데 ‘베트남 히딩크’니 ‘민간 외교관’이니 멋진 수식어가 따라붙어 요즘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며 껄껄 웃었다.

박항서 축구대표팀 감독은 베트남에서 '국민 영웅'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항서 축구대표팀 감독은 베트남에서 '국민 영웅'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임현동 기자

지난해 10월 베트남 지휘봉을 잡은 이후 박 감독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1월 아시아챔피언십과 지난 달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23세 이하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각각 준우승과 4위를 했다. 두 대회 모두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 성적이다. 한국과 맞붙은 아시안게임 4강전에서 킥오프를 앞두고 경기장에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가슴에 손을 올린 박 감독의 모습도 화제였다. 그는 “국내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반향이 컸다”며 “궁금해하는 현지 기자들에게 ‘나는 베트남 감독이면서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제 대회에서 한국과 다시 만나면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지만, 그 때도 애국가가 나오면 가슴에 손을 올릴 것’이라고 말해주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박항서 감독. 베트남에서 '아빠 리더십'을 앞세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임현동 기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박항서 감독. 베트남에서 '아빠 리더십'을 앞세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 감독의 성공 비결로는 ‘아빠 리더십’이 첫 손에 꼽힌다. 아시안게임 기간에 바쁜 팀닥터들을 도와 선수의 발 마사지를 해준 박 감독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나는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저 누구에게나 진정성 있게 대할 뿐”이라 언급한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선수들에게 마음을 전달할 방법이 스킨십 뿐이라 그저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는 또 “발 마사지 사진은 찍힌 줄도 몰랐다. 원래 선수단 대표팀 소집 기간에는 소셜미디어를 금지하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한 번 봐줬다)”라며 웃었다.

박 감독은 베트남 생활이 무조건 쉬운 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때로는 문화적 차이로, 또는 다른 이유로 선수들과 충돌할 때도 있었다”며 “그럴 땐 한 템포 멈추고 선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부임 초기 베트남 선수들은 체구가 작은 점에 지나치게 집착해 강점인 순발력과 민첩성, 지구력을 살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뒹굴며 고정관념을 하나씩 무너뜨렸다”고 했다.

베트남에서의 성공 비결을 웃으며 설명하는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임현동 기자

베트남에서의 성공 비결을 웃으며 설명하는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임현동 기자

박 감독은 선수들이 나태해진다 싶으면 “베트남 정신을 잃은 것 아니냐”며 일침을 가한다. 그는 “선수들은 베트남 국민의 강점으로 4가지를 말했다. ▶단결심 ▶자존심 ▶영리함 ▶불굴의 투지 등이다. 여기에 내가 발견한 ▶목표 의식까지 더해 이른바 ‘베트남 정신’을 완성했다”며 “베트남 정신을 언급하면 선수들의 눈빛부터 바뀐다”고 했다.

박 감독은 자신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이 좀 더 가까운 나라가 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알아보는 분들이 많다보니 ‘모자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받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성원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팬들의 사진 촬영과 사인 요청에 모두 응한다”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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