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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첨 본 연극이 억수로 웃긴다 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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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경남 통영시 학림도에서 12일 열린 '벅수골' 극단의 '구두코와 구두굽' 공연 모습. 섬마을 주민들이 모처럼 활짝 웃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송봉근 기자

"내 평생 처음 연극을 보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

17일 오후 경남 통영시 사량도 아랫섬은 모처럼 주민들 웃음소리가 넘쳤다. 이날 새마을회관 앞에는 200여 주민이 모인 가운데 통영의 '벅수골' 극단이 코믹연극 '구두코와 구두굽'을 공연했다.

김동이(79)할머니는 "아이고, 참 재미있네"를 연발하며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직접 보니 TV보다 훨씬 재미있다"며 즐거워했다.

합판과 종이테이프를 붙여 만든 간이무대에는 구두통과 의자 등이 놓여 있고, 객석 뒤로는 등대와 '통통' 거리며 오가는 어선들이 보였다.

"아이고 할매요. 오늘 공기 좋은 사량도에 와서 회도 묵(먹)어 보고…, 우째(어째) 구두 딱은 기(게) 마음에 드능교(듭니까)."

구두닦이 '찍새' 역을 맡은 박승규(44)씨가 섬 지명을 사용해 가며 분위기를 잡는다. 바닷바람이 차가웠지만 접이의자에 앉은 200여 명의 관객은 이때부터 싱글벙글이다.

'닦새' '찍새' 등 구두닦이들과 나이트클럽 종업원 '춤새', 다방종업원 '영숙' 등 주인공들이 구두 깔창 밑에서 발견된 100만원짜리 수표를 서로 차지하려다 찢어 버리는 장면에 주민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몇몇 노인은 흥겨운 음악에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요즈음 통영시 앞 섬마을은 온통 웃음바다다. 벅수골 극단이 10일부터 19일까지 5개 섬을 돌면서 공연을 펼치기 때문이다. 섬사람들은 연극을 보며 외로움을 웃음으로 날려 보내고 있다.

한산도를 시작으로 학림도(12일), 사량도 윗섬(16일), 사량도 아랫섬, 욕지도를 릴레이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두 번째 공연이 펼쳐진 12일 통영시 산양읍 학림도 선착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통영 시내 남쪽 달아항에서 뱃길로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고 했다. 주로 낚시용 갯지렁이와 어패류를 채취해 생활하는 가난한 어촌이어서 통영까지 나가 공연을 볼 엄두를 못 내는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주민 수는 65가구 190명밖에 안 되지만 이날 연극을 보러 연대도.송도.저도 등 주변 3개 섬 주민까지 배를 타고 올 정도로 인기였다. 지팡이에다 며느리 부축을 받고 온 할머니도 보였다.

이번 공연은 벅수골이 문화 소외지역에 사는 섬 주민을 위해 마련했다. 경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금과 자체경비로 마련했다. 섬마을 공연을 위해 배우와 스태프 등 10여 명의 단원은 생업도 팽개쳤다.

영숙역을 맡았던 최선희(27.여)씨는 통영 시내 옷가게를 친구에게 맡겼다. 주연 배우인 이상철(50).박승규(44).이규성(36)씨도 대학 강의와 다른 작품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달려왔다.

전정권(46) 학림 어촌계장은 "평소 외로움과 문화적 소외감에 젖은 섬주민을 위해 좋은 행사"라며 "공연이 끝난 뒤 '다음에는 언제 오나' 묻는 노인들 질문에 답하느라 애먹었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극중에 무대 주변 화장실을 찾아 두루마리 화장지를 휘날리며 쫓아가고 대사에도 섬 지명을 넣는 등 연출의 현지화로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연극 시작 1시간 전에는 섬 안의 초등학생들을 초대해 연극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벅수골 극단 장창석 대표는 "주민들이 연극을 본 뒤 웃으며 돌아가는 것을 보니 보람을 느낀다"며 "내년에는 더 좋은 작품으로 섬을 찾겠다"고 말했다.

통영=김상진 기자 <daeda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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